약 15년 전, 전주 속 오랜 동네 중 하나에 불과했던 마을 골목마다 작업실과 갤러리, 공방들이 들어섰다. 예술가의 서정적인 손길로 새로운 이야기가 그려지는 이곳은 서학동 예술마을이다. 거창한 야망보다, 예술을 하고자 하는 소박한 기대를 품은 예술인들이 하나둘 모여 시작된 이곳의 가게들은 단순히 상업 생태계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끈끈하고 정 넘치는 이웃으로서 마을을 향유한다. 일상 속에 녹아든 다양한 모습이 예술로 산업화된 그들의 삶은 무언가 특별해 보인다.
이들 각자가 품은 이야기는 무엇이고 그들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고즈넉함 속, 오늘도 서학동에 새로운 색을 입히고 온기를 불어넣고 있는 사람들을 가까이서 만나보고자 한다.
‘초록장화’는 서학동 예술마을 촌장님의 작업실 겸 전시관이자 동네 예술인들의 공간이다. 서학동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자부심을 품고 문화예술인들 간의 만남을 상품으로 선물하시는 한숙 작가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보았다.
[Q.] 초록장화라는 특별한 공간을 만들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초록장화는 내가 닳도록 즐겨 신던 부츠 신발이에요. 처음, 이 마을에 정착하고, 나를 대변할 수 있으면서 거창한 의미를 두지 않는 이름으로 짓고자 이 공간을 초록장화라고 정했죠. 육아와 일을 병행할 수 있도록 작업실이 집 안채 바깥에서 연결된 공간을 물색하던 와중, 수국이 펴 있고 옛날 시골집 마당을 연상케 하는 안채 한옥을 서학동에서 찾았어요. 내 꿈을 이룰 수 있는 집을 찾은 것 같은 떨림에 곧장 아파트에서 나왔고, 오늘까지도 조금씩 공사하고 개조하면서 공간을 가꾸고 있어요. 이때만 해도 예술인은 4명뿐이었는데, 예술적인 삶을 꿈꾸는 사람들이 모여 마을이 풍성해졌죠.
[Q.] 서학동만이 가진 고유의 분위기가 참 매력적이고 특별한 것 같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작품을 만들고 촌장으로도 활동하시는 건 어떤가요?
나는 역사나 민중을 이야기하거나, 마을에 와서의 내 개인적인 감몽을 보여주는 작업을 해요. 또 서학동 특성상 공동 작업 기획도 활발히 이루어져서 다른 작가들과 같이 진행하기도 하고요. 도시에서는 고립된 작업을 많이 했는데, 그때도 좋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외로움 속 작품을 했다고나 할까요? 상대를 맞춰줘야 하는 어려움도 있지만, 마을 안에서 서로 응원하며 원동력이 되어 주니, 함께하는 기쁨이 있어요.
마을 행사나 축제를 기획하는 것도 우리의 작업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특히 축제 기간은, 적은 예산 속에서도 지역 주민들과 같이 만들어가고 서로 보완해 가는 맛이 있고, 아파트 같은 개인주의 문화와는 다른 매력이 있어요. 촌장의 역할에도 만족하지만, 동시에 작가로서의 나한테도 집중하면서 좋은 작업을 이어가고 싶기도 해요.
[Q.] 서학동 예술마을의 한 주민으로서 바람이나 비전이 있으신가요?
이곳의 상업 생태계는 나처럼 자기 공간을 유지하면서 살고 있는 작가들 덕분에 보존할 수 있어요. 초기에 온 사람들이 빚을 지더라도 집을 산 덕에 전반적인 땅값을 쥐고 있으니, 우리가 지켜온 고유함이 무너지지 않아요. 반대로 임대를 한 작가들은 터무니없는 월세에 쫓겨나곤 해요. 이런 부분은 예술가들이 품위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린 돈 때문이 아닌, 나를 실현하고 좋은 작업을 위해서 예술을 하는 것인 만큼, 건물을 비싸게 팔아준다고 나오는, 지역에 대한 자기 책임을 회피하는 일은 하지 말았으면 해요.
또, 작가들이 사는 마을에 가장 필요한 건 갤러리에요. 전문 기획자와 갤러리를 지어서 운영하고 싶은 비전이 있습니다.
다음 행선지는 생각지도 못한 경험을 선물해 준 작가 부부의 집이다. 초록장화의 한숙 작가와의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그녀는 소개해 주고 싶은 작가님들이 있다며 앞장섰다. 동네 주민들 간 끈끈한 공동체성을 실감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한숙 작가를 뒤따라 나섰다.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한 골목을 지나 작가 부부의 집에 들어서자 새하얀 개 하늘이와 따뜻한 차, 그리고 동화책 작가의 이야기보따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 아내와 책방 주인의 꿈을 품은 작가 남편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화가 아내는 거실과 방 벽면마다 걸려있던 감수성 넘치는 그림들을 하나하나 소개해 주었고, 다채로운 사연과 감정이 담긴 각 캔버스는 그녀의 설명을 통해 되살아난 듯 보였다.
[Q.] 안녕하세요, 서학동에서 예술 활동을 하는 작가로서 본인을 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그림작가이자 소설가입니다. 동화책을 두 권을 이미 냈어요. 앞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표현하는 총 10권의 동화책을 내서 볼로냐 도서전에 나가고자 준비하고 있어요. 서학동은 작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이면서 풍성해진다고 생각해요. 그렇기에, 저 포함 이곳 사람들은 공동체성으로 꾸려진 마을의 이야기에 울림을 느껴요. 이 예쁜 마을에 나의 예술을 보태고 싶은 마음이 있죠. 문만 열면 작품과 사람이 있고, 공감할 수 있는 요소가 많아 큰 즐거움으로 다가오는 매력적인 곳이에요.
[Q.] 그림 작가님의 그림에서 유독 꽃이 돋보입니다.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요?
(명함을 보여주며) 생각하는 꽃이잖아요. 여기, 뒤집어진 ‘꽃’ 자는 우리가 가는 길에 뒤집혀도, 실패해도 괜찮다는 의미에요. 아픔마저도 나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그뿐 아니라, 마을에서 작품들이 이고 지는 것을 한숙 선생님은 “꽃”이라고 표현하셨어요. 동네의 공동체성을 통해, 각자의 것을 풀 때 아름답게 활짝 피는 꽃이요. 그 부분 때문에 보여드린 독후화에도, 이름에도 계속 꽃을 표현해요.
그림 작가는 서학동이 발전하기보다 예술가들이 그저 편히 머무르고 싶은 곳이길 바란다. 그리고 이러한 동네 안에 작은 런던을 담아올 예정이라고 했다. 아직 가 보지 못한 런던이 그리워, 연탄 방을 개조해 열 조금은 특별한 책방, ‘벤자민 하우스의 런던 책방'의 계획을 아내인 그림 작가를 통해 엿들어봤다.
[Q.] 이야기하신 런던 책방에 대해 들어 보고 싶어요.
우리 부부는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을 통해 책 읽는 법을 배울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소위 말해, ‘책 덕후’들이 문학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느낌이 물씬 담겨있는 책을 선택해서 팔 계획입니다. 우리가 직접 줄 그으면서 감명 깊게 읽었던, 인생에 필요한 책들 말이에요. 실제로 제 남편이 필기하면서 읽은 책들은 중고 책이어도 새 책값으로 사가는 지인이 있어요. 거기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남편 작가는, 독자로서 자신의 자취가 빼곡히 남겨진, ‘낙서 된 책'을 팔고자 한다. 런던 책방에서 파는 책은 마치 책방 주인과 함께 읽는 듯한 느낌이 들 것만 같다. 런던 책방에 꽂힐, 페이지 안에 “작품과 사람이 있고, 공감할 수 있는 요소가 많아 큰 즐거움을 주는,” 책들로 이 동네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따뜻하게 맞아준 작가 부부, 그리고 그들의 미래 언젠가의 런던 여행을 응원한다.
‘예술을 하는 동네’에서 예술을 팔지 않는 곳이 있다. 감성 넘치는 서학동의 일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이곳은 제비마트이다. 제로 웨이스트와 비건의 가치를 추구하며 지구를 대신해 이야기를 전하는 이 가게는 대표의 섬세함이 고스란히 묻어나 있다. 매일 아침, 제비마트의 문을 열며 예술가들 사이에서 친환경적인 라이프 스타일을 전파하는 대표의 모습을 담아봤다.
[Q.] 제비마트라는 이름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제비’ 하면 날아다니는 제비 많이 생각하시죠. 근데 제로 웨이스트의 ‘제’ 자랑 비건의 ‘비’자를 따서 제비이고, 그 뒤에 붙는 마트는, 편의점이나 일반 마트처럼 일상에서 누구나 편하게 갈 수 있는 곳임을 강조하고 싶었어요. 제로 웨이스트나 비건이라는 게 멀리 있지 않다는 점과, 이곳이 마트처럼 일상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을 담고 싶었습니다.
[Q.] 제로 웨이스트와 비건을 주제로 하는 마트를 창업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아직 제로 웨이스트나 비건이라 하면 많이들 장벽을 느끼지만, 정작 보면 우리가 먹는 것, 쓰는 것들의 작은 변화이지 특별하게 뭔가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에요. 일상에서 쓰는 칫솔을 플라스틱 대신 대담 칫솔을 쓰는 식으로, 일상에서 환경을 고려한 선택을 하는 거죠.
제 전공은 조경과 설계 관련으로, 숲과 관련된 시민단체에서 일을 시작했어요. 후에는 도시 재생 관련 일에 종사하며 시골과 환경에 대해 많이 접하게 됐어요. 덕분에 환경 관련해서 제게는 자연스러운 것들이 남들에겐 생소한 부분들이 생겼고 그걸 계기로 환경을 시작했어요.
비건을 처음 생각하게 된 건 2014년도에 들어간 청년몰에서예요. 고양이 컨셉의 카페를 운영했는데, 이 과정에서 길고양이 프로젝트 등에 참여하며 동물권에 관심을 두게 됐어요. 자연히 공장식 축산 문제와 사회적 약자 문제로 이어지면서, 좋아했던 고기를 포기하고 고민 끝에 비건을 지향하게 됐죠. 나의 비건 지향이 주변 사람들의 의식 개선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줬으면 했어요. 이런 제 다양한 가치관들을 결합해서 가게를 열게 됐습니다.
[Q.] 가게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철학은 무엇이며, 제비마트는 사장님과 서학동에게 어떤 의미를 지닌 곳인가요?
저희 가게 목표는 ‘가장 보통의 제로 웨이스트와 비건’이에요.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려워지기 때문에 일상으로 받아드리는 거죠. ‘특별할 필요가 없으니, 누구나 할 수 있다'가 저희 가게의 모토에요. 한 사람이 완벽하기보다, 열 사람이 어설프더라도 하나씩 늘려가면서 실현하는 게 더 효과적이니까요.
제비마트를 통해 제로 웨이스트나 비건을 알리는 활동들을 계속하고 있고, 저 자체로도 강사 활동을 하고 있어요. 처음 창업하고자 찾은 서학동은 참 재미있고 따뜻한 느낌이었어요. 그렇게 지금의 제비마트는, 예술가부터 관광객까지, 로컬과 여행객 모두가 오가는 곳이죠. 지나가다가 제로웨이스트에 대한 궁금증에 들리시기도 하고 주민들이 차 마시며 담소를 나누러 오시기도 하고요. 제비마트와 활발한 교류를 하면서 동네 식당들이 비건 메뉴를 개시하는 등, 커뮤니티가 함께 친환경적 가치를 홍보하고 도와주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Q.] 제비마트의 발전 가능성과 비전에 관해 이야기 해주세요.
저의 꿈은 제비마트를 더 이상 직접 운영하지 않는 거예요. 체계가 잘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수익이 저조하면 다른 가게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에 흔히들 하는 협동조합 대신 개인 운영을 택했어요. 자리가 잡히고 다른 직원을 통해 선순환할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되면 외부 활동에 더 집중하고 싶어요. 밖에서 더 활발히 제비마트의 가치를 알릴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서학동 예술마을은 예술인들과 주민들의 아름다움과 새로운 가치가 접목되는 공동체로서의 라이프 스타일을 지향한다. 예술을 꿈꾸며 모인 이 독특한 공동체는 우리에게 새로운 매력으로 다가온다.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눈 그들의 삶은 예술로 깊게 물들어 있었고, 그 안에는 예술 이상의 다채로운 이야기가 가득했다. 예술을 통해 작은 사회를 꾸려나가고, 우리에게 새로운 도전과 메시지를 던진다. 각자의 이야기를 품은 예술인들의 손길이 닿으며 개성 넘치는 매력으로 재해석되는 이 마을은 필자에게 긴 여운을 남길 듯하다.
글·사진: <local.kit in 전북> 산업팀 박채린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