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 경제학자’ 모종린 교수님께 듣는 연희동 이야기
연희동은 당신에게 어떤 공간인가? 누군가에겐 단순 주거지, 누군가에겐 통학하는 길거리, 또 누군가에겐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는 데이트 코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공간에 부여하는 의미는 각기 다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연희동 골목길은 정적이지만 매일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 우리는 연희동 골목마다 담긴 이야기들을 통해 연희동을 걷는 당신에게 이곳을 포착하는 새로운 시각을 전하고자 한다.
로컬키트는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 교수이자 ‘골목길 경제학자’로 유명한 <골목길 자본론>의 저자 모종린 교수님과 함께하는 ‘연희 걷다’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글에 앞서 모종린 교수님의 ‘골목길 자본론’과 ‘인문학,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다’의 두 저작을 소개한다. 골목길에 대한 교수님의 철학과 가치를 창출해 내는 골목에 관한 깊은 통찰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이곳 연희동에 대한 그의 애정 어린 시선과 날카로운 분석력이 돋보인다.
연희동은 오늘날 대규모 단독주택 주거전용지역이자 골목 상권의 거점이라고 할 수 있다. 연희동은 안산 끝자락을 품고 있는 단독주택들이 풍기는 고즈넉하고 차분한 정취를 담고 있는 동네이자 홍익대학교와 연세대학교를 끼고 있는 덕에 역동적인 젊음의 에너지가 골목 구석구석 느껴진다.
교수님께서는 골목길의 상권과 브랜딩에 대한 깊은 조예를 보여주셨다. 연희동과 신촌, 연남으로 구성된 서촌 일대를 뉴욕의 보보스로 대표되는 웨스트빌리지에 비유하였고, 이곳 연희동을 서울의 ‘보보스’라고 이름 지으셨다. 뉴욕의 골목상권은 어퍼 이스트사이드로 대표되는 부르주아지, 윌리엄스버그로 대표되는 보헤미안 그리고 웨스트빌리지로 대표되는 보보스로 구성되는데, 그중에서도 보보스는 90년대에 부상한 ‘보보’라는 부르주아와 보헤미안의 합성어이다. 방랑적이고 자유분방하며 예술적 감각을 추구하는 보헤미안과 부르주아가 합쳐진 보보는 여유가 넘치면서도 독창적인 분위기를 뽐낸다. 연희동 또한 조용한 단독주택 주거지 밑으로 형성된, 꽤나 긴 역사를 자랑하는 자그마한 음식점과 상점들이 마치 뉴욕의 보보스를 연상시킨다.
이번 ‘연희 걷다’에서는 골목에 위치한 다양한 상점들 중에서도 연희동의 로컬 콘텐츠를 구성하는 ‘앵커스토어’ 들을 살펴보는 것이 목표였다. 먼저 사러가쇼핑센터는 연희동의 공간적 중추를 담당한다. 사러가쇼핑센터를 중심으로 여러 음식 상권들이 형성돼 있는 덕에 도로 이름도 ‘연희맛로’라고 불린다. 45년 전통을 자랑하는 피터팬 제과점을 시작으로 골목마다 연희동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다양한 상점들이 즐비하다.
연희동은 서울외국인학교와 한성화교중학교가 위치해 있어 이국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이 또 다른 매력이다. 이곳에 자리한 미국인들이 종종 찾는 뉴욕식 정통 샌드위치 가게 ‘03 인 앤 아웃’, 일본인 사장님께서 만드는 일식 카레집인 ‘히메지’ 등 이국적인 분위기에서 식사를 즐길 수 있는 식당 또한 연희동의 ‘앵커스토어’ 중 하나가 된다.
교수님께서는 동네를 살리는 길은 바로 골목상권에 있으며, 골목상권이 살아나려면 커피, 베이커리, 독립서점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셨다. 연희동을 45년간 지킨 피터팬 제과점, 연희 오거리 가운데에 자리하여 어느새 연희동의 랜드마크가 된 ‘연희동 사진관’ 등은 이곳에 독창적인 골목상권이 형성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연희동을 걷다 보면, 건물들이 통일된 디자인을 하고 있다는 것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건물의 본체와 새로 만든 가게가 오픈 브릿지로 이어진 형태를 띤다. 또한 중정(中庭)이 형성됨으로써 안정감이 느껴지고 탁 트인 시야가 확보된다. 이러한 건축 형태는 쿠움파트너스라는 기업이 연희동의 건물 70여 개를 리모델링하여 생겨났다. 쿠움파트너스는 하나의 단독주택에 오픈 브릿지를 활용해 상업 공간을 개발하였고, 이는 죽어가는 단독주택들을 독창적인 상점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여 연희 골목의 상권을 부흥시킨 주요한 전략이 된다.
연희동과 연남동을 잇는 굴다리 또한 이곳의 상권을 부흥시킨 의외의 요소이다. 굴다리를 통해 연남동 유동 인구가 연희동으로 유입되어 연희동에 새로운 상권을 끌어들였고, 굴다리와의 시너지를 통해 기존 연희동의 상당한 흡입력 또한 빛을 발할 수 있었다.
연희동 골목길을 탐방하며, 로컬 상점들이 만들어내는 브랜드 가치의 엄청난 영향력에 대해 몸소 느끼고 배울 수 있었다. 교수님께서는 골목 상권에 있어서 무엇보다 ‘콘텐츠’ 중심의 상권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셨다. 단순 유행에 편승하기만 하는 소위 ‘반짝 상권’들은 절대로 장기적으로 동네의 상권을 부흥시킬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가지는 스토리이자 콘텐츠인 것이다. 그리고 연희동은 여느 동네보다도 고유한 콘텐츠를 풍부히 가지고 있었다. 더불어, 콘텐츠 중심의 상권은 독자적으로는 운영될 수 없다. 지역 작가, 일러스트레이터들과의 협업을 통한 콘텐츠 생산이 중요하다.
어떻게 한 동네가 단순 주거지에서 관광지, 나아가 산업 가치를 창출하는 브랜드 산업단지로 나아갈 수 있는가? 이에 교수님께서 제시한 답은 ‘크리에이티브 디스트릭트(Creative district)’이다. 오늘날 인기를 몰고 있는 상권들이 속속들이 생겨나고 있지만, ‘콘텐츠’를 담고 있는 동네는 거의 없다는 것이 교수님의 지적이다. 건축, 디자인, 콘텐츠가 세상을 바꿀 수 있으며, 그 콘텐츠는 ‘주민 문화’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연희동은 높은 수준의 콘텐츠 및 주민 문화가 만들어낸 상권을 성공적으로 정착시킬 수 있었기에 정책과 외부 세력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자신만의 로컬리티를 기반으로 한 상권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교수님께서는 이러한 작업이 국정 과제보다는 민간의 과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로컬에서 활동하는 ‘오프라인 크리에이터’들이 주민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콘텐츠를 생산하고, 그 비즈니스가 동네에 부가가치를 창출하여 로컬리티가 오프라인 비즈니스의 핵심 자원이 되는 구조가 골목 상권을 살리는 선순환 구조가 된다. 더불어, 오프라인 크리에이터들을 중심으로 동네의 커뮤니티가 구축된다면 더욱 지속가능한 골목상권의 정착이 가능할 것이다.
조용하지만 강한 동네문화의 성지, 연희동
연희동은 별도의 정부 사업 없이 민간이 만든 생태계로, 고유의 콘텐츠와 주민문화를 지닌 ‘동네문화의 성지’다. 모종린 교수님은 ‘크리에이티브 디스트릭트’로써 콘텐츠를 생산하는 동네가 되기 위해서는 특정 건축환경과 동네 구조를 가져야만 가능하다고 말씀하셨다. 연희동은 그러한 조건을 갖춘 생산지구다.
서대문구는 전반적으로 저층 건축물 비중이 높다. 연희동 역시 단독 주택 지역으로 스카이라인이 낮고, 안산과 홍제천 등 좋은 자연환경을 가져 특유의 잔잔한 골목 분위기를 연출한다.
또한, 연희는 조용하지만 강하다. 홍대 상권 확장의 영향과 주변 대학생 생활 인구 흡수로 중심 지역으로서 기능한다. 연희는 대학생, 외국인, 예술가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다. 여기에 건축환경, 홍대권/신촌권으로서의 특성이 융합되어 차이나타운, 아메리칸타운, 홍대타운 등 여러 가지 요소를 나타내는 동네가 되었다.
한편, 강연을 들으면서 흥미로웠던 점은 ‘주민의 비율’에 관한 이야기였다. 팝업, 대기업 중심으로 돌아가는 성수동과 달리 연희동은 주민:방문객 비율이 6:4로, 주민문화가 잘 조성되어 있다. 방문객으로 상권이 돌아가는 많은 동네와 달리, 연희동은 넉넉한 주민 비율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는 코로나라는 큰 상권 위기에서도 연희동이 살아남은 비결이다.
그렇다면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콘텐츠 타운’으로서 연희동은 어떤가. 연희동에는 건축 환경과 주민 문화를 바탕으로 로컬 콘텐츠가 탄탄하게 자리 잡고 있다.
연희 걷다 투어에서 언급하셨듯이, 모종린 교수님은 골목상권의 3 요소가 ‘카페, 베이커리, 독립서점’이라고 하셨다. 연희동은 이런 요소를 갖추고 있는 동네다. 서대문구 전체 독립서점의 61.5%는 연희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베이커리와 카페 또한 연희동 몇 발짝 걸으면 하나씩 나올 정도로 많다.
이에 더해 생활권인 ‘사러가마트,’ 공방과 작업실 등의 독립 브랜드, ‘보틀팩토리’ 같은 제로웨이스트샵과 디자인 샵까지, 각자의 개성을 가진 로컬 콘텐츠가 구석구석 자리 잡고 있다. 최근에는 어반플레이 (지속가능한 도시 운영을 위한 기업), 쿠움파트너스 (건축 관련 컨설팅)가 나서서 연희, 연남 지역중심 로컬 콘텐츠를 개발하고 있다.
Editor 김유민: 연희동은 살고 싶은 동네였다. ‘나도 여기 한번 살아 보고 싶다’라는 감정이 드는 동네야말로 우리가 찾아다니는 라이프스타일을 갖춘 지역이 아닐까? 편하게 걸어 다닐 수 있는 잔잔한 거리와 심심하지 않은 콘텐츠들, 그리고 연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나 지금의 연희동을 만들었다. 연희동을 걸으면 나도 모르게 독특한 건물 디자인에 눈이 가고, 다양한 음식점, 예쁜 카페에 들어가고 싶은 욕구가 생겨났다. 자신만의 개성 있는 색깔을 가진 연희동을 바라보며, 나는 지역들의 균형 발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원구도심에 형성되어 있었던 골목 상권을 잘 보존한 서울과 달리, 부산이나 대구 같은 도시들의 원도심은 이미 상실되어 있다. 이런 도심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너무 어려운 질문이지만 한 번쯤은 생각해봐야 하는 질문이다. 연희동과 같은 이상적인 동네들이 지역 곳곳에 많이 형성되는 것은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고 어쩌면 절대 해결되지 않는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문제에 작은 관심이라도 가져보는 것이 또 하나의 발걸음이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Editor 배승민: 연희동에 놀러 간 적은 있었어도, 연희동을 뜯어본 적은 있었나? 연희동은 생각보다 매력적인 동네였다. 저층 건물 곳곳에는 개성 넘치는 상점들이 빼곡히 늘어서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장소의 시간이 흐려지는 느낌을 받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시간 위에 더욱 단단히 기틀을 다지고 있었다. 연희동을 걷고 있자면 퇴적암의 단면을 낱낱이 뜯어보는 것만 같다. 그 시간들은 하나의 무늬가 되어 우리의 걸음걸음마다 눈에 상을 맺는다.
Editor 강서연: 젊음의 거리 신촌과는 또 다른 차분한 분위기를 풍기는 연희동을 너무나 좋아한다. 하지만 그곳을 ‘좋아한다’고 말하기엔 그동안 연희동에 관해 알지 못했던 점이 많았음을 연희 걷다에 참여하며 새삼 깨달았다. 모종린 교수님과 연희골목 구석구석의 앵커스토어들을 직접 방문하며 연희동이 어떻게 하여 오늘날의 독창적인 로컬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는지 보고 느낄 수 있었다. 비단 연희동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곳곳의 침체된 동네 상권이 활기를 되찾기 위해 ‘콘텐츠’를 담은 주민 문화가 중요하며 또 그 핵심이 골목길에 있다는 점도 배울 수 있었다. 연희동에 대한 교수님의 남다른 애정에 나 또한 연희동을 사랑하는 또 다른 시각을 얻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Editor 박수민: 신촌의 소란스러움이 마냥 정겹게만 느껴지지 않는 순간들이 이따금씩 찾아온다. 그럴 때면, 익숙한 사람들과 체인점의 향연에서 빠져나와, 익명의 섬과도 같이 느껴지는 연희동으로 향해곤 한다. 보헤미안과 부르주아의 융합.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온 주민들과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러 온 도전자들이 모여 형성한 커뮤니티가 바로 연희동이다. 신촌 등지와의 좋지 않은 접근성이 오히려 연희동만의 "기 빨리지 않는 차분함"으로 설명되는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에 일조했고, 지금까지도 나를 비롯해 소란스럽고 생동적인 서울시에서의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게 해주는 탈출구 역할을 맡게 된 연희동이다. 왜 연희동이 이토록 나에게 정서적 안정감을 주는 매력적 공간이었는지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던 소중한 하루였다.
Editor 장소예: 신촌에서 대학생으로서 항상 탈출구가 되어주었던 연희동. 서대문 03을 타고 3분만 가면 신촌 상권과는 아예 다른 느낌의 새로운 동네가 나온다. 연희동의 낮은 층고와 아기자기한 스몰 비즈니스들이 풍기는 분위기는 왠지 모를 안정감을 준다. 나름 연희동 전문가라 자만하며 연희의 매력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동네의 매력은 작은 요소 하나하나를 뜯어보는 것에서 느낄 수 있음을 이번 연희 걷다 투어를 통해 알게 되었다. 연희동이 오래오래 주민을 중심으로 만들어나갈 수 있는 동네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