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하는 을지로, 공존하는 을지로
동네는 변화한다. 한때는 사람들로 북적였던 동네가 쇠퇴하기도 하고, 아무것도 없었던 동네가 ‘핫플레이스’로 부상하기도 한다. 을지로라는 서울의 한 오래된 동네는 이 모든 변화를 겪으며 자라온 사정 많은 지역이다. 을지로는 생산업자들의 작은 가게들이 골목의 모양대로 얼기설기 얽혀 있는 이색적인 동네이다. 이 골목으로 들어가면 조명 가게들, 저 골목으로 들어가면 타일 가게들. 서로 다른 상가들이 구획을 나누어 골목을 채우며 을지로다운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을지로는 일찍이 경성고등연예관을 중심으로 인쇄소들이 생겨나며 많은 사람이 몰리는 동네 중 하나였다. 제조산업과 경공업의 발전으로 을지로에 근대화의 물결이 퍼지나 싶었지만, 6·25전쟁 이후 빈민촌이 형성되고 상권이 사라지며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 국내 최초 주상복합건물인 세운상가가 들어서고 도시재생사업을 시작하며 을지로는 다시 예전의 북적이던 골목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이 사업의 일환으로, 을지로3가역 주변에는 건물과 건물 사이에 틈이 없는 ‘맞벽 건축’ 양식의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맞벽 건축은 건물 간 최소 이격거리의 제한이 없는 건축 양식으로, 을지로의 판잣집과 초가집을 감추기 위한 미화의 목적으로서 도입되었다.
그러나 을지로의 바리케이드로써 건설된 맞벽 건물은 더 이상 을지로를 숨기는 요소가 아니다. 틈 하나 없이 골목을 메우고 있는 건물들과 건물 안의 좁고 가파른 계단은 많은 사람이 을지로를 방문하게 만드는 색다른 풍경을 제공한다.
이런 독특한 감성을 가진 동네에 문화예술가들이 모여들며 을지로는 낮에는 모두가 살아가고, 밤에는 모두가 즐기는 동네로 변화했다. 2023년의 을지로는 재개발과 도시재생으로 뜨겁다. 동시에, 동네의 옛 기억을 헐지 않으면서 동네를 유지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이렇게 산업, 예술, 재개발의 소용돌이 속에서 을지로는 나아간다. 로컬키트는 을지로를 직접 답사하며, ‘생산’하는 을지로의 모습과 ‘공존’하는 을지로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
공구 상가는 컨테이너가 쌓인 듯한 특이한 구조로 이루어진 건물들이 많았다. 일요일에 방문했던 탓에 문을 닫은 가게가 대부분이긴 하였지만, 곳곳에 쌓여있는 물건들이 평소 이곳의 모습을 연상케 하였다. 끝없이 연결된 좁고 굽이진 골목길들마다 가게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었고, 중간중간 문을 연 식당과 카페 또한 찾을 수 있었다. 특히, 낡은 공구 상가들 사이사이에 건포도 박혀 있듯 자리 잡고 있는 아기자기한 카페들이 이루어내는 조금은 낯선 풍경은 을지로의 모습을 잘 담고 있는 것 같았다.
공구 상가 골목에서 나와 큰길 쪽으로 오면 청계천이 보인다.
청계천 근처에는 여러 가지 공사나 보수작업 진행이 한창이었고, 주변을 걸어 다니는 사람도 꽤 볼 수 있었다. 광화문 광장 방면을 바라보면 높은 빌딩 숲들이 보이지만, 막상 을지로 쪽에 있는 건물들의 시계는 한참 전에 멈춘 것 같은 풍경이 참 독특했다. 언젠가는 을지로에 있는 골목들도 저 빌딩들처럼 바뀔 것만 같아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영화에 빠져들다, 금지옥엽
을지로 일대는 영세 사업자를 중심으로 소규모 제조업이 발달해 있다. 세운청계상가 일대는 을지로의 제조업을 상징하는 대표적 공간이다. 60년대 만들어진 이곳은 기다란 주상복합 형태의 상가단지로 그 독특한 외관과 상징성의 문화적 가치가 높다. 이곳을 거닐다 보면 오래된 가게들 사이로 금지옥엽이 보인다. 금지옥엽은 영화 포스터, OST Vinyl, 영화 서적, 영화 굿즈 등을 판매하는 공간이다. 을지로는 출판 인쇄산업이 발달했는데, 인쇄물 관련 굿즈가 주를 이루는 금지옥엽은 이곳 일대를 문화적으로 재해석한 듯한 인상을 준다. 금지옥엽을 둘러보면 영화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그 분위기에 매료될 수밖에 없다. 유명 영화 OST가 흘러나오고, 고전영화부터 최신영화까지 여러 시대를 아우르는 콘텐츠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한 번쯤은 이름을 들어본 영화의 음반과 포스터, 그리고 영화 줄거리의 기반이 된 소설책 등이 눈길을 끈다. 구경만 하고 가기 아쉽다면, 방명록을 남기거나 나중에 온라인 스토어를 통해 굿즈를 다시 살펴볼 수 있다. 영화가 주는 내면의 풍요로움을 느끼고 싶다면, 금지옥엽을 들르자. 예전에 봤던 영화에 대한 그리움과 앞으로 보고 싶은 영화에 대한 기대감이 교차하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적한 철공소 골목을 헤매다 전시 공간 ‘을지로 OF’에 도착했다. 간판이 잘 보이지 않아 겨우 찾은 건물로 들어서자 가파른 계단이 펼쳐졌다. 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아 머뭇거리다가 계단 중간에 적힌 “힘내십시요. 거의 다 왔읍니다.”라는 문장과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로컬키트는 어둡고 좁은 계단을 한 줄로 오르기 시작했다.
을지로 OF는 일용직 노동자가 머물던 달방 3개를 개조해서 만든 공간이다. 다양한 작가들이 이곳을 통하여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선보일 수 있게 되었고, 이에 따라 을지로 OF는 새로운 예술을 끊임없이 생성하는 공간이 되었다. 11월 11일부터 12월 3일까지는 《라디오가 켜진 방 Room with Radio On》전시가 진행된다. 방문을 닫아 빛이 사라져야만 부엉이 소리가 나는 <부엉이의 시간>과 같이, 신기술을 활용한 방식으로 전시된 작품이 역설적으로 '노스탤지어'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플래시로 라디오에 빛을 쬐여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벽에 조그맣게 붙어있는 상자 안에는 플래시 몇 개가 준비되어 있다. 플래시를 손에 쥐고 까만 방에 들어가면 전시장 바닥에 여덟 개의 라디오가 놓여 있다. 관객이 직접 라디오에 플래시를 비추면 빛에 반응한 라디오에서 각각의 트랙이 재생된다. 그렇게 어떤 라디오는 멈추고, 어떤 라디오는 재생되면서 자꾸만 하나의 새로운 음악이 탄생한다.
이 오래된 공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품고 로컬키트는 다시 한 줄로 나란히 계단을 내려왔다. 조금 전 어두운 방에서 들었던 음악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앞만 보고 을지로를 걷다 보면, 카페처럼 생긴 공간은 한 군데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고개를 들어 건물 외벽을 자세히 관찰하다 보면, 조그만 화분에 작은물이라고 쓰여있는 간판 아닌 간판이 보인다.
조금은 막막하게 느껴지는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면, 그곳에 작은물이 있다.
작은물은 7년 전 5명의 친구가 모여 만든 카페이자 공연 공간이다. 입구에는 작은 예술가들의 앨범과 CD를 파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카운터에는 을지로의 다른 상인들이 제작한 스티커들이 올려져 있다. 뮤지션들이 이곳에 찾아와 계획 없이 버스킹이나 공연을 하기도 한다. 독특하고 반짝거리는 다양한 장식과 요소들은 바깥의 공업 공간과는 전혀 다른 공간으로 들어온 느낌을 준다. 그러나 창문 너머 보이는 가게들의 셔터와 작은물의 분위기는 묘하게 어울린다. 구석구석 카페를 찾는 재미부터 사막 속 오아시스처럼 특별한 공간을 발견하는 경험까지. 을지로의 ‘힙함’은 이런 반전 매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대기업 프랜차이즈들이 들어와 많은 거리의 고유한 특색이 사라져 가는 지금, 큰물이 아닌 작은물이 들어와 있는 을지로의 골목들은 여전히 자신만의 색깔을 잃지 않고 있다.
을지로에서 물씬 느껴지는 홍콩의 향기.
서울의 홍콩, 룽키를 소개한다.
을지로 3가와 을지로 4가, 충무로역까지 세 개의 역의 중심에 놓인 룽키는 ‘힙지로’라는 타이틀에 제격인 곳이다. 그런데 ‘힙’함이란 무엇일까? 유니크함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대체할 수 없는 그곳만의 ‘무언가’를 위해 해당 장소를 방문하고 사진을 남긴다. 룽키 역시 그 ‘무언가’를 갖춘 곳이다. 입구에 들어설 때부터 은은한 조명과, 벽면에 붙은 중경삼림 포스터, 흘러나오는 음악 속 광둥어에서 홍콩의 분위기에 흠뻑 젖을 수 있다.
메뉴도 심상치 않다. 우육면에는 소 힘줄인 ‘스지 추가’ 옵션이 있으며 테이블 옆에는 같이 곁들여 먹을 수 있는 양배추 절임과 고추기름 라유가 놓여 있다. 홍콩 음식점답게 각 메뉴에는 고수가 듬뿍 올려 나오며 고량주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음식점에서는 보기 어려운 밀크티 메뉴까지 준비되어 있다. 이런 유니크함이 모여 을지로를 ‘힙지로’로 만든다.
그렇다고 유니크함이 무조건 이국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을지로가 ‘힙지로’인 이유는 각각의 유니크함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오래된 공구상점들이 한 거리에 쭉 늘어서 있는 풍경, 비좁아 보였던 골목길에 숨어있는 카페, 옥탑방에서 열리는 전시 모두 을지로를 을지로답게 만드는 요소이다. 그렇게 우리 로컬키트 을지로팀은 ‘힙의 공존’을 즐기고 왔다.
을지로 노포들에서 느껴지는 직장인들의 희로애락
고단한 하루를 보낸 직장인들이 하나둘씩 모여드는 이곳은 을지로 노가리 골목. 을지로의 노포들로 유명한 노가리 골목과 골뱅이 골목을 로컬키트가 다녀왔다. 노가리 골목의 터줏대감이기도 한 만선호프를 지나 을지로의 세월을 느끼며 노가리 골목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하지만 기대와 다르게 공사와 증축으로 어수선한 분위기였던 것이 아쉬웠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방문한 곳은 골뱅이 골목. 소문처럼 화려한 네온간판들이 힙지로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길목에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골뱅이 골목과 북적북적한 힙지로를 지나 로컬키트가 방문한 식당은 ‘고씨네 고추장찌개’. 가게 분위기와 평점만 보더라도 근방에서 꽤 오랜 시간 직장인들의 애환을 달래줬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로컬키트가 방문한 을지로는 특유의 투박함과 예스러움이 네온사인의 조명들과 어우러져 독특한 매력을 보이는 곳이었다. 뜨끈한 고추장찌개처럼 대단한 건 없지만, 자꾸만 손이 가는 것이 을지로만의 매력 같다.
글·사진: <local.kit> 김유민 에디터, 박시현 에디터, 백경목 에디터, 김현진 에디터, 이지수 에디터, 차태영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