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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컬키트 localkit Dec 06. 2023

도자기가 살아 숨 쉬는 마을, 계룡산도예촌


“우리는 저마다 마음속에 산을 품고 산다”

한국인의 마음 한편에는 구불구불한 산맥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을까. 어딜 가나 온통 산 천지인 대한민국, 누구나 산에 얽힌 이야기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지방 도시의 라이프스타일을 논할 때도 산은  빼놓을 수 없는 소재다. 로컬키트는 올 하반기 충청도로 답사를 다녀오며 그곳의 대표 명산들 중 하나인 계룡산을 방문했다. 빼어난 경관으로 유명한 이곳 계룡산의 품 속에는 문화적 가치가 돋보이는 특별한 마을이 숨어있다. 충남 공주시 상산리에 위치한 계룡산도예촌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계룡산도예촌은 대략 30년 전 도예가 분들이 모여 만드신 도자기 마을이다. 이곳 도예가 분들은 계룡산 대대로 내려오는 철화분청사기를 비롯해 각자의 도방에서 활발한 도예 활동을 하고 계신다. 특정 분야의 전문가들이 한데 모여 비슷한 라이프스타일을 공유하는 것은 전국적으로 보기 드문 광경이다. 계룡산도예촌을 걷다 보면 지붕 위에 자전거가 앉아있는, 마치 어린아이가 그린 꿈속의 집을 닮은 “소여도방”이 나온다. 처음같이 늘 한결같다는 뜻을 가진 이곳 소여도방의 정순자 작가님을 만나 뵀다.

작가님, 안녕하세요! 집이 너무 아기자기하고 인상적이네요. 소여도방 지붕에 있는 자전거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있을까요?


저 자전거가 우리 집의 대표적인 상징물이에요. 사람들은 하늘을 나는 자전거, ET라고 이야기하는데 그냥 재밌잖아요. 자전거를 꼭 땅에서만 타는 게 아니라 하늘에서도 날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했어요.


계룡산도예촌의 도예가 분들이 어떤 작업을 하시는지 간단히 소개 부탁드립니다.

저희가 30대 때 도자기 연구모임이 있었어요. 그 당시 이 지역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계룡산 주변에 터를 잡고 철화분청사기를 계승 및 재해석하는 마을을 만들면 어떻겠냐 해서 동호인끼리 만든 아트 빌리지가 이곳이에요. 중부권의 특징이 철화분청사기라고 해서, 철로 그림을 그리는 분청사기가 나오는 건 여기 계룡산 일대밖에 없어요. 그런 분청사기의 전통을 저희가 30년간 지키면서 이곳이 중부권 철화분청사기의 메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중이에요. 이곳 작가님들은 기본적으로 철화분청사기를 만드시고, 추가적으로 자신의 스타일과 개성에 따라 각자 도방에서 작업을 해요.


산을 옆에 끼고 살다 보면 산에 정이 가고 보는 것만으로도 안정감이 느껴질 것 같아요. 작가님은 이곳에 30년간 생활하시면서 계룡산이 어떤 의미로 다가오실까요?

도자기를 배우러 오시는 분이 하는 말씀이, 여기 와서 놀더라도 1년만 계룡산의 사계가 변하는 모습을 지켜봐라. 계룡산은 계절마다 우리에게 안겨주는 게 틀려요. 계절이 변하는 모습이 마치 우리의 일생을 보는 것 같아요. 여기는 겨울이 참 긴데, 우리 집 앞에 있는 계룡산 산불봉은 3월까지 눈이 안 녹다가 다시 봄 색깔이 입히면서 다시 푸릇푸릇해져요. 그런 식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산이 다 보여주는 것 같아요. 또 명산의 넓은 품이 우리를 감싸주는 느낌이에요. 밖으로 나가면 스트레스받던 것도 여기만 오면 긴장이 확 풀어져요. 꼭 엄마가 고생한 아들 토닥토닥하듯이 그런 느낌? 원래는 이곳이 마을이 아니었는데 산이 우리에게 터전을 허락해 줬잖아요. 사실 터전을 허락해 준 건지 우리가 비집고 들어온 건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처음에는 좋다는 생각이 안 들었는데 살면 살수록 산이 우리에게 품을 내줬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계룡산이 작가님의 창작 활동에 많은 영감을 줬을 것 같아요. 계룡산 말고 대전 같은 도시에서 작업을 하셨다면 지금과는 다른 점이 있었을까요?

도시에 살았다면 다른 도예가들과 치열하게 경쟁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남들보다 잘해야 하고, 남들보다 잘나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거기에 걸맞는 작업을 하지 않았을까요? 계룡산이 나한테 가져다준 교훈이라면, 그냥 내 주어진 밥그릇만큼만 하자. 잘하려는 노력을 하지 말자. 내가 누구랑 경쟁하고 잘나고 이런 게 큰 의미가 있나? 내가 죽는 날까지 쉬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거에 감사하단 생각을 산 옆에 사는 사람으로서 많이 했어요. 물론 돈은 벌어야 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 막 어금니를 문 그런 도자기가 아니라서 참 좋다, 흙의 느낌이 이런 거였구나, 이런 편안함. 그런 마음가짐으로 작업할 수 있도록 산이 나한테 가르쳐준 것 같아요. 행복이란 즐겁고 돈이 많고, 이런 게 아니라 그냥 불행하지 않은 것이 일상이겠죠?


전문가 분들이 마을 공동체를 이루어 작업하는 생활만의 매력이 있을까요?

우리도 여기에 정착하기 전에는 참 생활이 어려웠고, 여기 와서도 쉽고 편하게 사는 건 아니에요. 그렇지만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이 있고, 내 공방이 있고, 또 집이 있다는 그런 부분이 참 좋아요. 우리가 젊을 때 이곳에 들어와서 30년 정도 살았고, 같은 일을 하면서 먹고 사니까 서로 의지하기도 하고 외부적으로 일이 생기면 한마음으로 가족처럼 뭉치잖아요. 그렇게 단합하다 보니까 세월이 흐르니 우리가 사회에 나가도 할 수 있는 일들이 없어져 버린 거야. 약간은 사회와 동떨어진 사람으로 변한 것 같을 때가 있어요. 요즘은 은행 일이든 뭐든 다 키오스크랑 기계로 하는데 우리는 아직도 손으로 하는 일을 하잖아요. 그래도 계룡산이라는 좋은 환경에서 작업할 여건이 되는 예술가들이 대한민국에 썩 많지 않을 거예요.


젊은 나이에 아트 빌리지를 만드는 건 큰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일 같은데, 계룡산도예촌을 만드시게 된 원동력이 무엇일까요?

요즘은 재료를 인터넷으로 편하게 구할 수 있잖아요. 당시는 그렇지 못한 시절이라서 우리에겐 일종의 간절함이 있었어요. 지금은 수요가 많지는 않아도 반죽하는 기계라든지 작업용 물품들이 많이 보편화되어 있고 공급처를 통해 구매할 수 있는데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죠. 그러다 보니 도예가들끼리 자체적으로 단합할 수 있었고, 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키자는 의지력이 있었던 거죠. 사실 이곳을 만들 때 나라에서 따로 지원을 받지도 않았고, 지자체의 도움 없이 자발적으로 작가들이 모여서 운영하게 됐어요. 다른 도예촌들은 국가사업으로 시작된 경우가 많은데 이곳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오히려 우리가 명맥을 유지하고 현대에 물들지 않은 점을 높게 사는 분들도 많아요.


철화분청사기를 복원하고 재해석하시면서 현대 문화에 맞게 스타일 측면에서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철화분청사기는 귀족이나 왕실이 쓰던 도자기는 아니고, 서민들이 쓰던 도자기예요. 나라가 불안하던 시기에 만들어졌다 보니까 그림들이 코믹해요. 금강변에 물고기가 많이 살아서 물고기 문양을 많이 그렸는데, 양반 사대부처럼 화려한 잉어를 그리는 게 아니라 초등학생이 그린 피카소 그림처럼 그렸어요. 그러다 보니 문양들이 굉장히 자유롭고 해학적이란 특징이 있어요. 사실 철화분청사기가 생활 자기로서는 조금 불편한 점이 있기도 하고, 요즘 트렌드 자체가 깔끔함을 추구하다 보니 한계가 느껴질 때가 많아요. 현대에 맞게 깔끔하게 표현하려 하는데 사실 전통은 칙칙하잖아요. 그래서 여러 가지 시도는 하고 있지만, 주로 전통적이고 장식적인 걸 많이 만들고 있어요.


계룡산도예촌과 같은 민간 아트 빌리지가 앞으로도 생겨날 수 있을까요?

예술가들은 개성적이고 외골수적 성향이 있기 때문에 모여 살기 쉽지 않아요. 또 아티스트의 첫출발은 굉장히 가난해요. 돈 있는 사람들이 왜 이 고생을 해, 쉽게 돈 버는 다른 일이 얼마나 많은데 시작도 안 하죠. 이게 경제적으로 힘든 일이다 보니 굳이 아트 빌리지를 세우거나 동호회를 만들어 시작하기는 쉽지 않죠. 우리도 이곳에 처음 왔을 때는 잘 알려지지 않았고, 마을에 들어올 때 눈길을 뚫어야 하고 마당에 토끼가 뛰어놀고 집 앞에 산물이 졸졸 흘러가는 그런 시골이었어요. 이런 산골에 마을을 만들어서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기 어렵죠. 힘든 일을 자처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대학교와 대학원을 도자기 관련된 과를 졸업하셨는데, 도예촌에 들어오실 만큼 도자기에 어떤 매력을 느끼셨나요?

미술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저는 흙을 만졌을 때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고운 흙을 만지면 아기를 만지는 듯한 기분이 들고, 거친 흙을 만지면 농사 지을 때 미네랄이 듬뿍 들어있는 흙을 만지는 느낌이 들어요. 그리고 도자기를 만들고 보면 자연 물질이라 그런지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그래서 도자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흙이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 같아서 참 좋아요.


도자기를 만드실 때 추구하는 분위기 또는 담으려 하시는 메시지가 있을까요?

제가 동글동글하게 생겼잖아요. 그림 그리는 사람들 보면 다 본인을 닮게 그리더라고요. 본인의 이미지를 담아내는 건데, 저 같은 경우에는 한국 전통 인형인 꼭두 있죠? 사실 인형은 일본에서 건너온 말이고, 순우리말로는 꼭두라 하거든요. 옛날에는 마을의 손재주 있는 사람이 나무를 깎아서 아이들 장난감으로 주고, 장례식 상여에 장식품으로 꼭두를 만들기도 했어요. 그러다 보니 꼭두는 외국의 얼굴이 아니라 우리 옆의 이웃, 즉 한국의 얼굴인 거예요. 제가 한국적인 것에 관심이 많기도 하고, 동글동글한 꼭두를 만들 때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꼭두 인형을 많이 만드는 편이에요. 요즘은 테라코타를 많이 만드는데 사람들이 봤을 때 행복하고 즐거운 마음을 담아내려고 해요.


나태주 시인의 “계룡산을 훔치다”에 실린 작가님의 작품들 중 동물이나 부부가 쌍을 지어 나란히 서 있는 작품이 많은 것 같아요. 여기에 작가님께서 의도하신 메시지가 있을까요?

남편이 2009년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어요. 나도 의식하진 않았지만 거기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있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는 상여를 할 때 부장품을 화려하게 붙였어요. 우리는 죽음을 슬픈 걸로 생각하는데 실은 우리가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일 뿐이에요. 그래서 살아있는 사람이 먼저 가는 사람 외롭지 않게 친구가 되어라, 하는 의미로 상여 꼭두를 많이 만들어요. 어쩌면 저한테도 그런 애도의 시간이 있지 않았나 싶어요. 사실 그런 질문은 오늘 처음 들어봐요.


쌍을 짓고 있는 작품들 가운데 닭 두 마리가 나오는 Kind of Red를 개인적으로 인상 깊게 봤습니다. 작품명을 Kind of Red라고 지으신 이유가 있을까요?

우리가 전통혼례를 할 때 닭을 놓잖아요. 암탉과 수탉이 꽃을 주고받는 모습에서 사랑의 이미지를 표현했는데, 이 작품은 전통 분청의 칼라 작업, 즉 현대화된 철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어요. 도자기 안에 있는 암탉과 수탉이 서로를 좋아하는 레드빛, 뭐 그런 의미가 있어요.


소여도방을 찾아주시는 분들 가운데 기억에 남으시는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가끔 손재주가 타고나신 분들이 있더라고요. 기능적으로 굉장히 뛰어나셨는데, 본인이 도자기를 해야겠단 의지가 없으셨어요. 반대로 어떤 분들은 기능적으로 떨어지시는데 도자기를 너무 좋아하는 거야. 흙 만지고 작업하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성향이신 분들이 있어요. 개인적으로 이런 걸 안 배웠으면 좋겠다 싶은데도 즐거워하시는 모습을 보면 그 마음이 참 예쁘게 느껴져요. 우리가 자식을 낳아도 꼭 잘생긴 자식만 예뻐하는 건 아니잖아요? 만들다 보면 결과물이 안 예뻐도 내 자식은 다 이쁘듯이 너무 이쁘다면서 행복해하시더라고요.


작가님께서 오랫동안 도예 활동을 하시면서 각별히 공들였거나 마음에 드셨던 작품 또는 전시가 있으실까요?

2013년에 개인전 할 때 꼭두 작품을 많이 만들었어요. 그때 만들었던 조그마한 작업물들이 기억에 남아요.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싶은 작품들이 많았는데, 엿 바꿔먹듯이 돈 받고 팔아서 지금 가지고 있는 건 없어요. 불행하게도 그때는 나중에 다시 만들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베스트는 항상 내일 나온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어쩌다 지인 집에 가면 내가 이걸 왜 팔았지 싶은 작품들이 있어요. 그래도 환갑을 지나면서 돌아보니, 이것도 내 욕심이고 애착이란 생각이 들어요. 이제는 도방에 있는 물건들이 내 소유가 아니라, 얼른 제자리로 찾아갔으면 좋겠어요. 접시는 접시대로 용도가 있고, 사발은 사발대로 용도가 있잖아요? 도자기도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소여도방의 이야기는 소여도방에서 끝나지 않는다.”

소여도방에서 끝날 줄 알았던 소여도방의 이야기는 공주시에서 남은 답사를 하는 도중 간간히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 인터뷰를 마치고 방문한 계룡산 인근의 한 식당에는 익숙한 그림체의 액자 하나가 걸려 있었다. 닭 두 마리가 나란히 서로를 쳐다보고 있는, 누가 봐도 정순자 작가님의 작품이었다. 소여도방에 가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텐데, 아는 게 많아지면 이런 재밌는 모습도 눈에 들어오는가 보다.

또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우리에게 친숙한 나태주 시인께서도 정순자 작가님에 대해 표현하신 글이 있었다: “누군가 계룡산 기슭을 지나다가 하늘보다 서러운 눈빛과 꽃보다 아름다운 표정을 지은 여인네를 만났다면 그녀는 분명 정순자란 이름을 지닌 도예가일 것이다. 아직은 곱때정한 얼굴, 도통 화장기가 없고 햇빛에 그을려 황토 빛으로 변한 한 여인네 말이다. 그것이 진정 그렇다면 우리네 인생은 얼마나 서럽고 안쓰럽고 처절하도록 아름답기까지 한 것이어야만 하는가!”


“좋은 이야기도 담는 그릇이 중요하다.”

소여도방을 둘러보면 그곳의 집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지붕 위에 올라간 자전거, 수도꼭지 모양의 문고리… 모두 정순자 작가님의 개성이 가득 담겨있다. 도자기에 비유하면, 소여도방은 작가님의 개성을 담은 알록달록한 그릇이라 할 수 있다. 답사를 마치고 돌아온 서울에는 아쉽게도 그런 집들이 많지 않아 보였다. 집집마다 저만의 특별한 이야기가 있겠지만, 적어도 집의 외관만 보고는 그것을 알기 어려웠다. 좋은 이야기도 담는 그릇이 중요하다. 서울의 집들도 집주인을 닮아서, 굳이 힘을 들이지 않아도 각자의 이야기가 쉽게 읽힌다면 얼마나 좋을까. 소여도방 같은 공간이 서울에도 많아지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사진: <local.kit in 충청> 행정팀 백경목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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