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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cal Park Dec 28. 2021

이디스 워튼 '여름' 읽고 그리기

Edith Wharton  'Summer'




이디스 워튼은 1862년생으로 20세기 초에 활발하게 활동한 미국 작가다. 여름은 1917년작으로 작가 본인이 생전 가장 좋아했던 본인 작품이었다고 한다. 이디스는 위노나 라이더의 영화로도 유명한 '순수의 시대'원작자로, 이 책으로 그녀는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 시절 상류층 가문에서 태어나 유럽 각지에서 머물며 다양한 공부를 했고,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유럽에 머물면서 구호활동에도 힘썼다고 한다. 나에겐 처음으로 시도한 그녀의 작품이다.




채리티는 산속에 숨어 사는 부랑자들 사이에서 태어나 후견인인 '로열'씨 부부네 손에서 자라게 된다. 로열 부인이 죽은 후 로열(노년의 남성)은 10대 후반의 채리티를 여성으로 대하며 급기야 결혼 청혼을 하기에 이른다. 채리티는 로열 씨에게 혐오감을 느끼지만 지식이 짧은 데다 그 도시를 벗어난 적이 없고 미성년자인 신분 때문에 로열 씨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어느 날 동네 도서관 사서로 일하는 채리티 앞에 도서관장의 조카이자 대도시 출신의 건축가 하니가 나타난다. 하니가 그곳에 머무는 동안 두 사람은 가까워지며 연인관계가 되고 그걸 알게 된 동네 사람들로부터 구설수에 오르는가 하면 급기야 로열 씨에게는 '갈보년'이라는 모욕을 당하게 된다. 하니를 사랑하지만 두 사람의 격차에서 오는 수치심과 로열 씨에 대한 복잡한 감정 때문에 채리티는 혼란을 느낀다. 하지만 하니는 자신의 지적, 금전적 수준과 비슷한 사람과 결혼함을 알리며 채리티에게 이별을 고하고,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던 채리티는 그 사실을 숨기고 그를 놓아준다. 죽을듯한 비통함에 자신의 출신지인 산으로 되돌아가려는 채리티 앞에 로열 씨는 정중하게? 다가와 그녀를 존중하고 사랑하겠노라 고백하며 다시 한번 결혼을 청한다. 채리티는 그의 진심을 보고 지금껏 자신 곁에 늘 있어줬던 사람은 로열 씨뿐임을 새삼 느끼며 그와 결혼함을 결심하고 하니에게 자신의 결정을 알린다.





언젠가 (다양한 혐오가 버무리 됨에도 불구하고) 고전을 꼭 읽어야 하는가?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 글의 요지는 그럼에도 고전은 읽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나는 이 '여성 작가 독서록'에 모두에게 추천하고 싶은 여성 작가의 여성 서사 작품만을 담고 싶었는데 이 책을 덮으며 저 질문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됐다. 나는 이디스 워튼의 작품들 중 이 작품이 여성의 '성장'을 그려낸다고 해서 선택했다. 사실 서사란 건 과정을 담는 거라지만 그 결과가 가스라이팅의 종착점이라면 그것 또한 성장의 결과라고 받아들여야 할까? 사실 나는 이 책을 애초에 '성장'이라고 할 수 있는지조차 의문이다. 내가 보기엔 고작 작은 실패 앞에서 인생의 끈을 놓아버리고 파국으로 치닫는 여성 파괴 서사로 읽힌다. 여성이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자신 또한 성인으로서 누군가를 갈망한다는 걸 (고작) 머릿속으로 깨닫는 걸 가지고 '성장'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녀가 안나 카레니나처럼 주도적으로 인생을 불에 던진 것도 아니고 그 어떤 능동적인 태도로 사랑에 임한 것도 없는데 말이다. 그녀의 능동이란 삶의 희망을 놓고 한때 아버지였던 사람의 부인이 되고자 나락으로 한 발 내디딘 것뿐이다. 그렇다면 아마 고전이기에 시대적 배경을 보라는 요구를 받을 것이다. 그렇담 시대적 배경을 감안한다면 이 책에서 어떤 식의 새로운 행간을 읽을 수 있을까? 궁지에 몰린 여성의 마지못한 선택마저 '그녀의 선택'이라며 이 또한 성장이고 사랑의 형태라고 주장하는 책이 그저 고전이기에 득이 되고 살이 되리라 생각할 수 없다.


사실 남성 중심의 서사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데 동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성만큼 사회적 지위가 크게 바뀌지 않았고, 신분 계층적 갈등 정도는 현재도 유효한 부분이 크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전 속에서도 다양한 욕구를 가지고 움직인다. 하지만 남성의 고전에서 여성은 인간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남성을 구렁텅이에 빠트리거나, 남성의 욕망의 대상이 되거나, 남성을 각성시키는 존재로서만 존재한다. 이 또한 여성으로서 '고전을 꼭 읽어야 할까?'에 의문을 주는 부분이다. 남성 주인공에 감정이입을 하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에 동화되며 여성을 인간 취급하지 않는 그 시대적 관점을 따라가는 것이 여성 독자로서 필히 감내해야 할 일일까? 세상에 책은 아주 많다. 셜록 홈스를 읽으며 '여성은 태어나기를 하등 한 생물'이라고 비인간 취급하는 셜록을 그 시절을 감안해 기어코 이해하려는 게 무엇을 위한 이해인지. 생각건대 지금껏 쌓아 올려진 수많은 남성향 작품들의 현대적 재해석을 원천 봉쇄하고 그 시절의 남성관 여성관이 오랫동안 거론되길 원하는 사람들이 '그럼에도 고전을 읽으세요!'라고 주장하는 게 아닐지.




책을 읽으며 주인공 '채리쉬'의 얼굴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무색무취에 종이 인간같이 얄팍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생각 의지를 딱히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이 책에 '성장 소설'이라는 딱지를 붙인 것이 못마땅했고, 그래서 그녀의 이미지 또한 전혀 그려지지 않았던 것 같다.





이 글은 나의 관점으로 적힌 것이고, 이 책을 좋게 읽고 높이 평가하는 독자들은 많다. 책이 308페이지로 굉장히 얇기 때문에 그 시절엔 어떤 것이 파격이고, 어떤 것이 여성의 성장이었는지 호기심이 생긴다면 큰 부담 없이 도전해보길 권한다. 여름은 민음사와 문학동네 두 곳에서 출판됐지만 모두 같은 역자기 때문에 어느 버전을 읽어도 무관하다. 번역은 문장이 매끄럽지 못하고 약간 거슬리는 느낌을 받았지만 완전히 난해한 정도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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