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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cal Park Dec 20. 2021

여성의 설득 (The Female Persuasion)

메그 월리처 (Meg Wolitzer)



제목과 표지는 꼭 페미니즘 인문 도서 같지만 2019년에 미국에서 출판된 소설이다. 메그 월리처는 다수의 베스트셀러 작품을 가진데다 여성이 중심이 되는 이야기를 주로 써왔기 때문에 특별히 여성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는 작가다. 난 여성 작가에 여성 서사인 내용을 가장 선호하는데, 여성의 서사라고 해도 너무 불행 극복의 성장 스토리는 싫다. 읽기 괴로운 것이 우선이고, 이미 그 마저도 클리셰처럼 느껴져서다. 물론 아무런 위기 없이 이야기가 굴러갈 순 없지만 그게 좀 합리적이고 불행 전시는 아니었으면 한다. 죽을 둥 살 둥 노력해서 겨우 어둠을 벗어나는 내용이 아니라, 더 높은 산 정상까지 가는 그런 이야기가 좋다. 페미니즘이란 카테고리 안에서 여성들은 서로 연대하지만 또 그 안의 종교, 세대, 인종 등의 이해관계로 대립하기도 하는데, 그런 현시점에서 논의되야할 다양한 주제들이 거론되어 이 책을 읽기 전 줄거리에서부터 매우 끌렸다. 주인공 그리어를 중심으로 그녀와 연관된 여러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번갈아 가며 서술된다. 이 책의 추천사는 미드 '걸스'의 주연겸 감독인 레나 던햄이 써주었고, 니콜 키드먼은 아마존 스튜디오와 함께 이 작품을 영화화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똑똑하고 뛰어난 학생인 그리어는 가난하고 무지한 부모의 실수로 예일대학교에 합격하고도 장학금을 많이 주는 변두리 삼류 대학으로 진학하게 된다. 최대한 대학생활에 의욕을 내보고자 방문한 파티에서 교내 악질 성범죄자 대런에게 성추행을 당하게 되고, 피해자가 여럿 있음을 알게 되고 난 후 친구 '지'와 함께 이 일을 공론화시킨다. 하지만 학교는 이 일을 조용히 덮으려고 하고 그 부당함에 분노하던 중 학교에 강연을 온 노년의 유명 페미니스트 '페이스 프랭크'와 조우하게 되며 그리어는 본격적으로 여성 운동에 눈을 뜬다. 그녀와의 인연으로 신생 여성 재단에 합류해 세계의 착취당하는 여성들을 도우며 그리어는 스스로가 세상을 좀 더 좋게 만드는 데 일조한다는 성취감으로 더욱 페이스를 돕는 데 헌신한다. 이렇게 같은 이상을 바라보는 두 사람이지만, 오랜 세월 여성운동가로서 사회에서 부딪히며 현재의 재단 수장까지 오른 페이스와 갓 대학을 졸업해 그야말로 '이상향'을 꿈꾸는 그리어는 어느 지점에서 의견의 간극이 생기고 만다. 




여성운동이란 건 불변의 법칙을 담고 있지만, 시대의 흐름과 가치관에 따라 유동적인 부분도 많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을 처음 접한 후 나의 가치관과 도덕적 기준은 대변화를 맞았지만, 여전히 시류에 맞춰 내 관점은 변하고 있다. 비교적 이 문제에 대해 막 고민을 시작한 사람들이라면 '너무나 이상적인 완벽함'으로부터 자유로워 지길 조언하고 싶다. '모성애 신화'로부터 이어지는 완벽한 여성에 대한 사회적 요구는 여성들의 두 손 두 발을 옭아매고, 여성을 입막음하는 매서운 채찍으로 사용돼왔다. '여성으로서' 감내하는 모습은 아름답다는 거다. 그것이 아름답고 여자다움의 기준이었는데 어떻게 '요구'하는 여성의 모습이 사회적으로 좋게 보일 수가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감히 이 문제를 거론하는 사람은 도덕적 공격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고, 페미니즘은 유독 무결한 도덕성을 요구받는다. 그런데 이런 비난 논리에 많은 여성들은 스스로 발목이 잡혀 서로에 대한 지지를 잃거나 스스로 부족하다고 자책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이런 갈등마저 건강한 논의임을 강조한다. 아직 어리고 이상적인 그리어와 나이 들고 현실적인 페이스의 대립은 각자의 기준으로 서로를 비판할 수 있지만 결국 서로 연대하고 지지함으로써 더 큰 대의를 향해 노력하리라는 모습을 보여준다.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그리어 또한 대의를 위해 타협을 하고, 이상향을 꿈꾸는 새로운 그리어에게 공격을 당할 수 있다. 하지만 서프러제트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성 간의 비판과 고뇌는 결국은 더 나은 세상을 향해 딛는 걸음이 될 것이다.



그리어는 조용히 마음속에서 불꽃을 키워내는 캐릭터다. 그녀를 여성운동으로 이끌었던 불같은 성격의 친구  '지'와는 완전히 상반된 인물로, 고요하지만 큰 파동으로 제 안의 소리를 키워내는 인물이다. 그래서 외면적인 모습은 그 속의 뜨거운 불꽃을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얼굴일 거라 생각했다.


근래 읽었던 여성 문학 중에 가장 밝은 기운을 주는 책이었다. 세상의 불쾌하고 어두운 부분을 조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성'이 단어만으로도 비난받고 싸움이 나는 작금의 상황에 한 줄기 숨통을 틔어줄 수 있는 책이다. 물론 그리어도 본인의 아픔, 주변 인물들 간의 대립으로 고뇌하지만 그 모든 걸 가치 있게 승화시키며 성장하는 인물로서 본보기를 보인다. 책은 592페이지로 조금 두꺼운 편이지만, 챕터별로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인물들이 바뀌고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버리기도 하며 때론 주요 갈등의 골자를 여러 인물들의 생각으로 다양하게 다뤄주면서 완급조절을 하기에 전혀 지루함이 없다. 번역도 깔끔하고 매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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