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양가감정

by Loche


저녁이 되니 쌀쌀하다. 더불어 환절기 가을이 되면 레 느꼈던 쓸쓸함도 있다.


하지만 하도 데어서 이젠 쓸쓸함이 좋다. 할 거 다 해봤고 누릴 거 다 누려봤으니 못해봐서 아쉬운 것이 없다.


고독하지만 외롭지 않다. 나에게는 많은 시간이 있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다. 듣고 싶은 수업, 강연, 독서, 아이들과의 시간, 그리고 엄마와의 좋은 관계. 엄마는 나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직감적으로 아시는 것 같다. 며칠 전에도 만나서 안아드리고 같이 식사하고 스카이라운지에 가서 차도 같이 마시고, 내 팔짱 끼고 다니셨다. 그리고 내 말을 들으신다.


오늘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올해의 마지막 강연을 하였다. 그동안 입력된 게 많아서인지 지난번 강연 때보다 훨씬 다채롭고 풍부한 콘텐츠를 조합해서 말할 수 있었다. 아는 게 많아지니 말도 자연스럽게 술술 나왔다. 두 시간가량의 강연이 끝나자 학생들의 우렁찬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고, 그 박수는 좋은 강연에서나 나올 수 있는 인정과 감사함이 담겨있는 것이라는 알기에 안도할 수 있었다. 교실을 나설 때 두 시간 내내 뒷자리에서 강연을 들으셨던 선생님이 나를 배웅해 주시는데 요즘 학생들이 진로에 고민이 많은데 내 강연이 도움 많이 된 것 같다면서 고마움의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선생님의 눈동자를 보면서 나도 가슴이 따뜻해지고 뭉클하였다. 이런 게 좋은 강연을 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기쁨이다.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 용기와 희망을 주고 의지와 가능성, 긍정적인 마인드를 잘 심어주었다.


내년에는 강연 주제도 바꾸고 겨울 동안에 공부 많이 해서 학생들에게 더욱 유익한 이야기를 풀어볼 계획이다. 도서관 초청 작가들의 강연 못지않게 수준 높은 강연을 하고자 한다. 발표 자료도 겨울부터 새롭게 한 장씩 만들어봐야겠다.


박준 시인은 시를 쓰면서 참고할 서적을 구하러 도서관에 자주 간다고 한다. 갈 때마다 대출가능 권수를 최대한 채워서 들고 오는데 대부분 읽지 못하고 다시 반납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조적으로 말하기를 "나는 직업이 시인이 아니라 '책을 옮기는 사람'인가?"라는 생각이 든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는데 나도 그와 똑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웃었다. 박준 시인처럼 나도 도서관에 갈 때마다 대출받을 수 있는 최대 권수로 받아와서 못 읽고 그냥 반납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니까. 다행히 애들 대출증도 있어서 대출받을 수 있는 권수는 넉넉하다. 연체가 좀 돼도 다른 아이들 명의로 대출받으면 된다. 그렇게 내 대출 제한 기간이 풀리면 내 명의로 다시 받으면 되고.


마지막 강연을 잘할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좋은 강연과 수업을 많이 듣고 책도 많이 본 덕분이다. 세상을 보는 눈이 업그레이드되니 불안감도 줄어들고 정서도 많이 안정되었다. 자존감은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을 정도로 높고.


깜깜하고 쌀쌀한 저녁 공기를 스치며 혼자 걸으니 예전 생각이 난다. 같이 걷고 뛰면서 이야기 나누던 시절. 그때는 좋았지만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같이 있지 않아도 난 지금 충분히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어.


고독하지만 외롭지는 않아. 보고 싶은 책이 침실에, 식탁에, 화장실에, 사무실에, 차 안에, 가방 안에 잔뜩 널려있고, 여러 좋은 수업과 강연도 계속 이어져. 정말로 바빠. 어떤 날은 하루에 수업과 강연이 세 개 있는 날도 있는데 그렇게 예닐곱 시간 집중하다 보면 끝나고 녹초가 돼서 자기 전에 글 쓸 힘이 없어.


오늘은 여기까지만 쓰고 책 몇 장이라도 보고 잠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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