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와의 인연
다음 주 가족스키여행 현장체험학습 신청을 위해서 중3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있는 아들의 나이스학부모서비스에 들어갔다가 아이의 학업성적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영어와 수학 성적이 바닥이었다. 그동안 너무 관심이 없었구나. 이대로 고등학교 올라가면 학업 포기는 뻔하게 예상되었기에 지금이라도 뭔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게임 중독이 가장 커 보인다. 초등 고학년 때부터 심하게 중독인 걸 알기에 전처에게 전자기기 가까이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말했으나 들은 척도 안 했다. 학교에서 패드도 지급하니 PC 사주지 말라고 했으나 중학교 들어가자마자 나에게 동의 구하지도 않고 사줬다. 먹거리는 풍족하고 맛있게 잘해주고 용돈도 넉넉하게 주지만 자기 일이 바빠 아이들을 돌볼 시간이 없다. 음식 맛있지 않고 게임 못하게 간섭하는 아빠 집을 떠나서 뭘 하든 내버려 두는 엄마 집으로 가니 편할 수밖에. 그렇게 아이들은 내 집을 벗어났다.
통제할 수 없는 분리된 환경, 협조하지 않는 전처. 주말도 대체로 먹을 것만 준비해 놓고 하루 종일 회사에 가서 일하는 전처. 늘 바쁜 그 사람은 아이들 어렸을 때 학교 학부모 상담도, 학부모 공개 수업에도 한 번도 가본 적 없고, 심지어는 학교 졸업식에도 절반은 안 왔다. 나는 하나도 빠짐없이 다 갔다. 학부모 공개 수업에 가면 아이들은 자기 엄마나 아빠가 왔는지가 최대 관심사이다. 세 명이 초등 시절에는 1,2,3층을 수시로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세 아이들에게 교대로 얼굴 비추느라 땀이 뻘뻘 날 정도였고 아이들 등교도 다 내가 해줬다. 나는 어떻게든 휴가를 내서 학교 행사에 참여했고, 전처는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도 회의를 핑계로 항상 빠졌다.
일이 삶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 반면에 나는 아이들이 삶의 절반이다. 이걸 결혼 전에는 알 수가 없었지. 콩깍지가 벗겨지고 서로의 본색이 숨김없이 드러나니 같이 어울리며 한 집에서 부대끼며 살기에는 참 다른 스타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점점 멀어졌다.
그렇다고 내 잘못이 없지는 않다. 나도 많이 잘못했지. 알랑 드 보통의 책들을 미리 여러 번 읽어봤었더라면 그렇게 파국으로 치닫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 같이 뒤늦게 후회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어쩌리 이미 벌어진 일이고 돌이킬 수 없다. 지금이라도 잘 복기하고 더 성숙한 삶을 사려고 노력하는 수밖에.
상대의 어렸을 때의 성장과정이 성인이 되어서의 삶을 크게 좌우한다. 전처는 그런 환경에서 자랐기에 그런 사고와 행동이 나오는 것이었고, 한 때 사귀었거나 친했던 다른 여자들의 심리와 행동도 이젠 잘 이해가 간다.
그들 각자의 어렸을 때의 환경을 생각하면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런 다름이 있을 수 있음을 예상하지 못하고 만난 내가 문제였을 뿐. 그런 힘든 과정 속에서 많은 배움이 있긴 하지만. 지금이라도 공부하고 또 공부해서 다음에 같은 유형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하여 오랜 숙고 끝에 당신(들)을 다시 만나면 안 되겠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내가 앞으로 만나고 싶은 '인연'은 나를 크게 성장시켜 줄 사람이다. 일론 머스크처럼 내 의식의 범위와 스케일을 끝없이 확장시켜 줄 수 있는 사람. 나를 가슴 벅차도록 꿈꾸게 할 수 있는 사람. 하루살이 같은 사람 말고. 난 당신이 변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피천득이 그의 책에서 어떻게 적어놨는지는 안 읽어봐서 모르겠지만 그가 생각했던 인연은 내가 추구하는 인연 상과는 많이 다르지 않을까 싶다.
아침에 담임 선생님에게 전화로 대면 상담을 요청했더니 바로 오늘 오후에 시간이 된다고 해서 학교 수업 끝나는 시간에 찾아뵈었다. 작년에 학교에 오신 분으로 대학생처럼 보이는 20대이셨다. 그래서 아이들의 삶과 생각과 고민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듯 보였다.
선생님과 내가 나눈 대화를 아래와 같이 정리하였다.
PC나 패드, 폰을 물리적으로 통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아이가 스스로 깨닫게 해서 동기를 갖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큰딸처럼 한번 대오각성하면 그다음에는 자기가 알아서 성장한다
부모와 담임이 협력해서 아이에게 계속 관심을 가져주면 효과적일 것이다
아이가 공부를 안 하는 것은 아니고 영어와 수학을 제외한 다른 과목은 성적이 잘 나오니 공부를 해야겠다는 동기만 생기면 잘할 것이다. 담임이 보기에 아이는 문제가 없다. 사회성도 좋고 친구들도 많고 잘 지낸다.
학교에 문제 있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시는가. 학생 본인이 원하지 않는데 부모가 강제해서 학원 뺑뺑이 다니는 아이들 중에 정신이 심각하게 망가진 아이들 너무 많다. 사회성 없는 아이들도 많다. 아무하고도 어울리지 않고 외톨이로 지내는 아이들도 적지 않고. 그런 아이들의 정신적 문제는 어른이 되어서도 쉽게 해결되지 않고 장기적인 문제가 될 거라면서 그런 아이들이 정말 문제라면서 내 아들은 그런 문제는 없다면서 웃으셨다.
내일 아이가 등교하면 오늘 아버님과 상담했다는 이야기 해도 되냐고 물어보시기에 얼만든지 괜찮다고 했고 다음 주에 스키여행 가서 아이와 이야기해 보시고 다녀오시면 자기도 다시 아이와 이야기를 해보겠다고 하신다.
그렇게 아빠와 선생님이 같은 관심을 가져주면 아이도 뭔가 생각하게 되지 않겠냐고 말씀하신다.
밝고 환하게 웃으시며 현관까지 마중 나오셔서 인사해 주셨다.
다음 주에 다녀와서 전화드릴게요. 오늘 긴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생님.
잘 될 거야. 왜냐하면 넌 나의 아들이거든
언제나 너의 마지막 안전기지가 되어줄게
사랑해
(나도 사랑해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