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 신년 킥오프 미팅이 있었다.
오랜만에 보게 되는 사람들. 혼자 지내고 점심도 같이 안 먹고 회식도 일절 안가기에 어떤 이와는 일 년 넘게 얼굴을 안 본 사람도 있다.
며칠 전 작년 인사고과평가결과가 나왔는데 B를 받았다. 참 신기했다. 그렇게 놀아도 B를 받네. 직전 연도에 C를 받았었는데 올해는 B이니 급여도 좀 회복되겠다. 또 한 해를 잘 넘겼구나 안도해 본다.
엘리베이터 앞에 몰려있는 부서사람들과 잠시라도 같이 있기 불편해서 그 옆의 계단을 통해서 올라가 회의장 뒷자리 구석에 조심스럽게 앉는다. 나라는 존재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마음에 조용하게 사알짝. 한 시간 반 동안 공개된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한다니 좌불안석이 따로 없다.
부서장이 아이스 브레이킹 차원의 유머를 곁들이면서 오프닝 멘트를 하고 이어서 각 그룹장들이 나와서 그룹 소개와 올해의 계획을 발표한다. 각 그룹장의 발표가 끝날 때마다 질의응답과 고위급의 푸쉬성 멘트가 이어진다. 다행히 그분은 나랑 개인적인 관계가 괜찮아서 불이익을 걱정하지는 않아도 되는 사이. 그렇지만 그런 푸쉬 멘트를 들으면서 부서에 대한 기여도가 최하위인 나는 다른 누구보다도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바늘방석. 일 년에 몇 번 없는 그런 회의에 갈 때마다 바늘이 더 뾰족하고 두껍고 길어짐을 엉덩이로 느낀다.
저 멀리 사선의 PPT 자료를 본다. 마음은 자료 속으로 조금도 들어가지를 못하고 그저 방관자적인 입장에서 바라본다. 재미 하나도 없다. 나랑은 무관한 이야기들.
정년이 되기 전에 어서 자진 사직을 하자. 아무런 대안 없이 사직하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고 하루하루 자립할 준비를 해야지.
회의장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생각은 다들 제각각일 것이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다 다르고. 나와 업무적으로 아무런 득이 없다고 판단하는 이들은 철저하게 나를 외면하고 나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나에게 적대적이지 않다.
어떤 신입 직원은 작년에 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곳에 워크숍을 같이 차 타고 가면서 알랑 드 보통의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공감대를 형성했고 그분은 어쩌다 나를 뒤에서 보면 뛰어와서 인사를 하고 반갑게 미소를 짓는다. 종종 그분을 직장에서 만나게 될 때마다 나의 내면의 가치를 알아봐 주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진다.
이처럼 나를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극에서 극으로 다르다. 하지만 회사의 인간관계는 업무적인 관계일 뿐. 회사를 떠나면 신기루처럼 사라질 관계들이다.
회의가 끝나갈 무렵 점심 도시락이 배달이 되었고, 사각 골판지로 된 도시락 박스를 받아 든 나는 <도망치듯이> 잽싸게 회의장을 빠져나와 주차된 차로 향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직장에서 하는 일은 직장을 그만두는 순간 내가 계속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부서 사람들에게는 눈치가 참 많이 보이기는 하지만 나를 위해서는 그 일은 신경 끄고 내 미래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준비에 딴짓하는 것이 현명하다. 그렇다고 내가 비굴해질 것도 없고 움츠려들 필요도 없다. 내 도움이 꼭 필요한 이들에게는 도와준다.
이제 정말 시간이 많지 않다. 만족스럽지 않은 현재의 나로부터 달라지려면 작년과는 다르게, 극단적으로 다르게 살아야 한다.
새해 시작부터 두 번, 세 번, 네 번 거듭해서 각오를 다져본다.
감각의 유희는 이제 잠시 멈춤이다.
내가 자립하게 될 때까지.
가장 큰 불안부터 해소하고 보자.
유희는 마음 편해진 다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