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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줄 그래서 대출

레버리지

by Loche


자녀들과의 이번 일본 여행(이전 글[추억 만들기]참조)을 처음 떠올렸을 때 가장 걸렸던 것은 재정 상황이었다. 대출을 받지 않고서는 갈 수 없는 상황. 돈이 없으니 다음을 기약하자고 말하면 애들은 그냥 받아들이겠지만 가장 어리고 이쁜 막내는 스키도 타고 싶고 여행도 길게 가고 싶어 했다. 이 아이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여러 날을 고민한 결과 대출을 받아서라도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저런 정황상 애들을 다 데리고 나갈 수 있는 시기는 이번을 놓치면 언제가 될지 모를 일이었다. 일 년 전에 다 같이 동남아 여행을 간 이후로 줄곳 혼자 놀았었기에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필요해지기도 하였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일본 삿포로. 아이들은 아직 일본을 가본 적이 없어서 호기심도 많다. 난카이 대지진이 언제 일어날지 모른다는 것이 변수이긴 하지만.


직장에서 재직증명서와 원천징수영수증 최근 2년 치를 발급받아서 주거래은행으로 향했다. 번호표를 뽑아서 잠시 기다리다가 띵똥~ 소리와 함께 내 번호가 스크린 맨 위에 뜬 걸 보고 창구에 가서 눈인사만 하고 아무 말 없이 대뜸 서류부터 들이미니 직원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얼마나 대출받으실 거냐고 물어본다. 먼저 나의 신용대출 금리가 얼마인지 알아봐 달라고 했고 잠시 기다리니 4%가 안 된다고 한다. (우와! 신용대출 금리 좋네!) 그러면 주택담보대출 금리는 어느 정도인지 대충 알아봐 달라고 했더니 5% 정도 된다고 한다. 이럴 수도 있구나 신용대출금리가 주담대보다 낮다니 그것도 1% 이상이나. 나의 심리적인 경계선은 5%인데 4%가 안 된다고 하니 조금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최대로 받겠다고 말했다. 만약 주담대가 4%라면 주담대를 받을 생각도 있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그동안 재테크와 투자에 관한 여러 책들을 읽고 또 실전 경험을 쌓으면서 투자 감각과 확신이 생긴 터라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레버리지 투자를 위한 대출은 이제 편안한 마음으로 받을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창구 직원이 머리 굴리는 것이 보인다. 어디에 쓸 건지 물어보고 내 심리를 파악하려고 하는 게 보인다. 내부 상의와 결제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내 신용등급과는 무관하게 내부 한도 초과로 못 받을 수도 있다는 말도 하면서 은근 겁을 주네? 그 말을 들으면서 내 표정은 두려움보다는 그래 못 받으면 어쩔 수 없지, 코인도 있고 주식도 있으니까 그거 좀 팔아서 가면 되지라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편하다. 원래 대출받을 생각하기 전에 그 생각을 먼저 하긴 했는데 지금 시점에서는 그보다는 대출받는 것이 유리할 것 같다는 판단을 하였기에 은행을 찾은 것이었다.


잠시 코인 이야기를 하자면 이것도 스토리가 있다. 예전에 코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던 시기에 지인의 권유를 받고 코인 빙자 폰지 사기꾼이 운영하는 정체불명의 사이트에 잃어도 크게 부담이 없는 금액의 돈을 입금했는데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사기인 게 명확하게 보였다. 그래서 넣은 지 보름도 안 돼서 출금 신청을 했고 살 떨리는 초조하고 기나긴 기다림 끝에 날강도 같은 10%의 수수료를 떼어주고 돈을 돌려받았는데 그걸 현금이 아니라 비트코인으로 받은 것이었다. 그 돈이라도 돌려받은 게 어디야 하면서 그냥 놔두고 있었고 한 때 40% 가까이 폭락했다가 지금은 어느새 200%가 넘는 수익률을 보이고 있었다. 이거 팔면 대출 안 받아도 일본 갈 수 있을 정도로 불어났으니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내가 그 사기꾼들로부터 돌려받고 넉 달쯤 지났을까 더 이상 출금이 안된다는 아우성들이 금융사기 고발 사이트인 백두산 카페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인간의 욕심이란... 내가 보기에는 맹목적인 믿음이 가장 큰 원인이고 두 번째로는 책을 안 봐서 그렇다. 금융 공부하고 투자 공부 경제 공부 좀 했으면 과연 그렇게 속아 넘어갈까. 관련 책을 몇 권이라도 읽어보지 않고 요행만 바라니 그렇게 당할 수밖에. 뭐든지 알면 아는 만큼 보이고 손해를 줄일 수 있다. 모르는 게 문제이지. 심하게 표현하자면 모르는 게 죄이고 죄악이다. 스스로 자초한 형벌.


믿음 X

생각 O


내가 가장 위험하게 생각하는 단어가 바로 "믿음"이다. 멀쩡한 사람을 백치로 만들어 버리는 무시무시한 "믿음". 믿음의 반대말이 "생각"이다. 믿음은 나를 옭아매고 생각은 나를 자유롭게 한다. 진리는 믿음이 아니라 생각으로부터 나온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는 생각으로부터 나온 책이고 일독을 추천합니다.


비단 금융과 경제와 사기뿐만 아니라 연애도 생각과 공부를 해야 된다. 재회에 안절부절인 사람들은 책을 안 봐서 그렇다. 심리학, 인문학 등의 책을 많이 본 사람과 안 본 사람의 연애는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궁극에는 세상만사가 다 인간의 마음 작용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니 나보다 지혜로운 현인들의 책을 읽어보는 것은 삶의 모든 면에 도움이 된다. 별 도움 안 되고 악영향을 끼치는 자극적인 유튜브는 그만 보 진득하게 책을 보자. 누구처럼 이상하게 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저녁에 은행 창구 직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마도 승인은 날 것 같은데 카드 하나 만드시는 건 어떠냐고.

허허~ 꺾기를 하시겠다? 나참.. "며칠 전에 신규 카드 하나 이미 만들었거든요?" (국민행복카드를 신규발급받았다. 이유는 작년 말에 "전 국민 마음투자사업"에 신청을 해서 선정이 되었고 (이전 글 [심리상담 이야기] 참조. 이 이야기도 앞으로 재미나게 할 이야기 많을 듯) 상담센터에 가서 바우처 사용하려면 반드시 '국민행복카드'를 사용해야 한다.) 그렇게 말하니 직원이 못내 아쉬워한다. 메롱이다. 결국은 나를 조금도 못 꺾었으니.


다음날 아침에, 신청한 대출금이 입금이 되었다는 앱알람이 뜬다. 기존 얼마 안 남은 금리 높은 신용대출부터 완납한 후 해지하고 그리고 지금 받은 금리보다 높은 금리의 마통 잔액도 제로로 만들어놓으니 다음 주에 빠져나갈 일본여행 경비 카드결제 대금으로부터 마음이 편안해진다. 현금 안 받는 일본 식당에서 지출할 엔화도 넉넉히 환전했다.


남은 돈을 어떻게 레버리지 할까 생각하던 중에 오늘 큰 아이와 스키샵에 가서 머리통이 커진 만큼 새 헬멧을 사고 발이 커져서 부츠로 새로, 다 큰 만큼 스키복도 맘에 드는 걸로 사줬다. 오며 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생각하는 게 내 맘에 쏙 든다. 내 이야기를 먼저 꺼내면서 작년에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 그리고 인간관계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말했고, 아주 허심탄회하게 둘 다 가면 없는 대화를 나눴다.


최근에 내 생각 중에 하나인 중독(이전 글[중독 그만] 참조)에 대해서 말하며 모든 중독에서 거리를 두라고 말하니 자기도 내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기가 이런저런 중독될만한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하고 있는지를 이야기하는데 얘가 아주 건강한 생각과 판단으로 잘 성장하고 있구나 싶어서 기분이 매우 흐뭇했다.


한편 몇 해 전부터 조금씩 증여해 준 돈으로 굴리고 있는 미국 주식 현재 상황을 물어보니 나름 경험치도 쌓이고 수익을 많이 올리는 것을 보면서 투자 공부를 잘하고 있구나하고 기분이 좋았다. 증여해 준 보람이 있고 좀 더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들과 헤어지고 나서 톡으로 증권계좌번호 알려달라고 해서 적지 않은 금액을 송금한 후 대출받아서 보내는 돈이니 잘 키우라고 했다.


내리사랑..

나에게는 내 핏줄인 아이들이 제일 중요하다. 그리고 갈수록 더 그렇게 느낀다. 아이들과의 관계가 아주 좋다. 내가 친구처럼 대하고 진솔하게 대하고 사랑하니까 아이들도 나를 좋아한다. 나와의 여행도 좋아하고. 내가 아이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니까 내담자와 잘 맞는 상담사와의 관계라고 볼 수도 있을 정도다. 아이들에게 나는 안전기지이고 시간이 갈수록 더 안전한 기지가 될 것이다.


지금 갑자기 세상을 떠나도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조금도 후회와 아쉬움이 없다. 그 어떤 친구보다도 친한 친구가 내 아이들이다. 아이들이 크면 클수록 더 대화가 깊어지고 서로에게 위안이 되는 관계가 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리고 그런 관계의 지속과 깊이를 더하기 위해 대출을 받아서 여행을 간다.


일상을 벗어나서 멀리 긴 여행을 함께 한다는 것은 기억에 오래 남는 아주 특별한 추억을 선사한다. 연인과의 여행도 그렇지만 자녀들과의 긴 여행도 또한 그러하다.


내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이들과 틈틈이 세계 여행을 다닌 것이다. 많은 돈이 들었고 직장에 무리해서 휴가를 냈고 아이들 학교 수업을 적지 않게 빼먹어가면서까지 다녔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나와 아이들 간의 정신적 정서적 레버리지가 어마어마함을 느낀다.


그래서 이번 일본 여행도 또 어떤 특별한 추억이 만들어질지 기대되고 설레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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