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은성 Feb 24. 2021

음악, 신비한 환각제

가요를 즐겨 듣는다. 멜론 정기결제를 신청해두고 신곡도 자주 살펴보고 맞춤 추천곡도 자주 들어본다. 하이에나처럼 주기적으로 플레이리스트에 추가하고 싶은 노래를 사냥하러 나선다. 100곡을 들으면 1곡 정도 마음에 쏙 드는 곡을 만난다. 그 한 곡을 찾기 위해 기꺼이 적지 않은 시간과 수고를 할애한다. 발견하고 나면 ’ 1곡 반복 듣기‘ 설정으로 걸어두고 며칠 동안 반복해서 듣는다. 100번을 들어도 싫증 나지 않으면 나의 플레이리스트에 남아있을 자격을 부여해준다.     


음악은 참 묘하다. 힘이 있다. 물 먹은 솜처럼 몸이 무거울 때, 정말이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을 때 음악을 들으면 (그럴 때 들으려고 수집해 둔 곡들이 있다.) 아주 비싼 영양제를 맞은 것처럼 몸이 가뿐해져서 눈앞에 쌓여 있는 일들을 콧노래 부르면서 시작하게 된다. 아주 하기 싫은 일을 할 때도 신나는 댄스곡을 들으면 어깨를 들썩거리며 조금 덜 힘들게 그 일을 해낼 수 있다. 일할 때 켜 두는 배경음악에 ’ 노동요‘라는 재밌는 이름이 붙은 걸 보면 이런 음악의 위력을 모두가 공감하고 있다는 것 아닐까.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즐기는 유희들 중 가장 아찔한 만족감을 안겨주는 행위에 속하는 취미생활이다. 책과 어울리는 음악을 정성껏 고른다. 시간이 꽤 걸리는 작업이고 성공보다 실패가 더 잦은 과정이기도 하다. 성공 확률의 희소성 때문에 더 짜릿한 전율을 느낄 수 있는 게 아닐까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읽을 때 들었던 ’ 냉정과 열정 사이 ost‘는 책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너무 잘 어울려서 문장 한 줄 한 줄이 돋을새김 된 느낌을 받을 만큼 생생하게 전해졌다. 또 마커스 주삭의 <책도둑>을 읽을 때 들었던 안단티노의 ’ 내 마음의 안식처‘라는 피아노곡 역시 책과 너무나 잘 어울려서 같은 페이지를 읽어도 음악과 함께 들을 때 감정이 훨씬 고조되었다. 같이 들었던 음악들 덕분에 책에 충분히 흠뻑 빠져들 수 있었고 소설의 분위기에 깊이 취할 수 있었다. 이런 경험들은 이후 보통의 놀이들에서 느끼는 감흥이 시시하게 느껴질 만큼 황홀한 것이다.     


클래식에 대한 경외가 있다. 오랜 시간 살아남은 음악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텐데 그것을 누리고 싶다. 하지만 공부해서 알기보다 귀로 듣고 마음으로 느끼고 싶은 기대가 있다. 가요를 들을 때의 그 가슴 떨림을 느끼게 하는 클래식을 많이 만나고 싶다. 위대한 누군가의 음악이라고 해서 의무적으로 감동하고 싶지 않다. 아무것도 모르고 들은 어떤 선율에 감탄하고, 가슴 떨리고, 끝도 없이 슬픔에 빠지고, 혹은 춤을 추고 싶다. 그런 클래식 음악을 기다리고 있다. 빈약하지만 플레이리스트에 등재된 몇 곡의 클래식이 있는데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 드뷔시의 베르가마스크 모음곡 같은 너무나 유명한 곡들이다. 좀 더 부자가 되려면 찾아 듣는 수고를 들여야 하는데 번번이 가요에 우선순위가 밀리고 만다. 억지로 클래식을 듣는 시간을 내어 보자 해도 자꾸 미루게 되는 걸 보니 아직은 그 정도 갈망은 아닌 듯하다. 아직은 우연한 만남과 애호가들의 추천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기대해야 할까 보다.


아주 절망적인 순간에 처했을 때 나를 일으킬 수 있는 것들을 많이 축적해두자는 생각을 한다. 그것들 중 하나가 음악이다. 오랜 시간 들어온 나의 추억과 순간순간의 생각들 감정들이 뒤섞여 있는 노래들. 그것들이 내가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되살릴 힘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이 불가능할 것 같은 암담한 순간에 한 줄기 빛이 되어 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지금도 많이 듣고 자주 전율하며 음악과 함께하는 벅찬 추억들을 열심히 수집하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스타벅스 코르크 슬리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