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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성 Mar 01. 2021

길을 잃는 행운

대학을 졸업하고서 친구들과 처음 길을 나섰던 날을 기억한다. 아무런 계획 없이 차부터 고속도로에 올려놓았다. 첫 번째로 들른 휴게소에서 우동 한 그릇 먹고 커피 한잔 마시면서 그제서야 전국 지도를 펼치며 목적지를 의논했다.     


친구들과 여행지를 정할 때 어디를 가느냐는 상관이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디를 가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가느냐‘이다. 공기 좋은 숲이나 산길을 좋아했고 그 길 위에서 함께 걷는 것이 행복했다. 익숙하지 않은 길에 발을 내딛는 경험들은 겁이 많고 결단력 없는 나 혼자서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함께였기에 언제나 가능했고 모든 여행에서는 항상 얻는 게 있었다. 그때의 시간들이 없었다면 지금 보다 더 편협하고 두려운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있을 거라는 건 확실하다. 

    

신나게 걷다가 허기가 지면 근처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했고 근처 카페에서 커피 한 잔 마셨다. 맛집을 검색하지도 않았고 소문난 카페를 코스로 정하지도 않았다. 우연히 들른 식당의 밥이 맛있으면 맛있어서 오래 기억했고 맛이 없으면 맛이 없었다고 또 오래도록 기억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오래도록 우리들의 이야깃거리로 남겨두었다. 그런 아쉬움들까지도 여행의 일부임을 아는 우리들은 가끔은 길을 잃기를, 때로는 기차를 놓치기를 은근히 기대하는 마음이 있다. 일부러는 그렇게 하지 못 하지만 우연히 만난 그런 낭패들이 여행의 백미가 되어 자칫 밋밋할뻔했던 여행에 생기를 불어넣어 줄 거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가 여행을 앞두고 계획을 짜는 타입이 아니다.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많은 자료를 검색하고 그 자료들 중 하나를 선택하는 과정의 연속이라 시간도 많이 걸리고 몸도 고달픈 작업이다. 여행은 신났으면 좋겠는데 여행을 위해서까지 무언가를 준비해야 한다면 그 여행이라는 것이 일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싶어서 즉흥 여행 쪽을 선호한다. 그리고 여행에서의 우여곡절은 실패의 딱지가 아닌 추억의 카테고리에 저장될 것임을 자신하기 때문에 계획하지 않고 떠나는 것에 일말의 두려움이 없다.     


덕유산 국립공원을 목적지로 정하고 늦은 밤 네 명의 친구가 한 차를 타고 신나게 출발했던 적이 있었다. 밤 12시가 넘도록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한 상태였다. 덕유산 언저리의 국도를 따라가고 있었는데 어느새 가로등도 없는 아주 칠흑 같은 어둠과 부담스런 고요가 우리를 엄습한 순간이었다. 급기야 지도를 보며 따라가고 있던 길마저 끊어졌다. 어두운 산길이었고 주변엔 건물 하나 없었다. 네 명 모두 괜찮은 척했지만 모두 공포에 떨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무서운 티를 내면 진짜 무서워질 것이 두려워 내색을 할 수 없었고 더구나 운전을 하는 친구에게 부담을 주면 안 될 것 같아 있는 힘을 다해 괜찮은 척을 했다.      


얼어붙은 공포 속에 길을 돌아 나와 얼마간을 달려 파출소를 발견했다. 이미 숙소를 찾는 것은 무리인 상황이었고 인심 좋은 경찰관분이 파출소 숙직실에서 하룻밤을 재워주셨다. 아주 따뜻한 온돌 바닥에서 따뜻하게 잘 머문 하루였는데 아침에 서로의 얼굴이 얼마나 꾀죄죄했던지 한참 웃었던 기억이 아직도 선연하다. 

    

그때 이후로 길을 잃으면 어쩌지라는 두려움이 완전 사라졌다. 책에서 여행자들이 이야기하는 길을 잃은 이후에 여행이 시작된다는 말들도 온전히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역시 경험만 한 선생이 없다.     

 

어쩌면 단순한 게으름 때문에 여행 계획을 짜지 않게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경험들 덕에 구차하게나마 변명이라도 늘어놓을 수 있으니 이러나저러나 그 순간의 낭패는 분명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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