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깊다. 신앙인이 신을 섬기는 것과 비슷하다. 자연스럽게 책 읽기 전도(무교입니다만)를 많이 하게 된다. 그러면 상대가 묻는다. 책에 답이 있느냐고, 책이 길을 알려주냐고. 아쉽지만 책에는 답이 없다. 어느 책도 나의 인생에 대한 해답을 써놓을 순 없다. 그 해답은 자신만이 알 뿐이므로. 대신 책은 너를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줄 거라고 말한다.
엄밀히 말하면 나는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저 ‘좋아하는 책만 사랑하는 사람‘ 정도는 될 수 있을 것 같다. 일단 다독가가 아니다. 책을 느리게 읽고 조금씩 읽는다. 책을 읽어도 작가의 의도나 중심 생각을 날카롭게 이해하거나 책의 전체적인 메시지를 통찰력 있게 해석해내지도 못한다. 전혀 엉뚱한 해석을 하기도 하고 아주 사소한 내용에 크게 감흥하기도 하는 종잡을 수 없는 제멋대로 독서인이다. 다만 나의 일상을 채우고 있는 여러 가지 활동들 중에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행위가 독서인 건 분명하다.
처음 읽을 때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내 마음속을 소용돌이로 다 뒤집어엎어놓은 책도 시간이 지나면 주인공 이름조차 가물가물해지는데 과연 책이 나에게 진정 자양분이 되어주고 있는 것일까. 다른 훌륭한 독서가들은 자신이 읽었던 책들을 적재적소에 척척 꺼내어서 잘도 인용해 써먹는데 나는 그런 것도 못하면서 책을 읽었다고 할 수 있을까.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해도 될까 하는 수많은 의문들이 있었다.
그런 의문들은 책 읽기를 지식 습득의 방편으로 쓰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좀 더 영민한 사람이었다면 그간 읽은 책들을 세련되고 유용하게 잘 쓸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 못한 사람이어서 그간의 독서가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꼴이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더러는 그런 영민의 한계를 메모와 필사라는 성실함으로 채우기도 하지만 그것도 역시 나의 것으로 만들지 못했다. 나는 기껏해야 좋아하는 문장에 깊게 밑줄을 긋고 숨을 한번 멈추며 감탄하는 정도밖에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나에겐 책 읽기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찾아야 했다. 아주 오래전 고등학교 과학 수업 시간까지 거슬러 갔다. 혼합물과 화합물의 차이를 설명하실 때 콩나물비빔밥 이야기로 비유를 해주셨다. 음식을 먹고 배설을 할 때 먹었던 콩나물이 그대로 나오는 건 혼합물이고 다 소화되어 몸속에 흡수가 되면 화합물이다라고. 이 비유는 좋은 책을 읽고도 명문장 한 줄 인용할 줄 모르는 자신에 대한 위로가 되어주었다. 문장들은 내 노트 위에 당당히 인용되지 못했지만 꼭꼭 소화되어 나의 성장과 변화에 기여했으니 정말 제대로 잘 쓰이고 떠난 것이다.
좋은 책들을 읽고 그 문장들이 한 줄도 내게 남아 있지 않아도 된다. 그 글들은 피가 되고 세포가 되어서 서서히 나를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놓을 테니까. 무엇이 달라지냐면 <눈>이 달라진다. 세계를 보는 눈 말이다. 걱정거리들이 적어진다.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진다. 아름다운 것들이 많아지고 설레임이 생긴다. 용기 있는 사람이 된다. 자신을 신뢰하게 된다. 무엇이 진짜 가치 있는 것인지 구별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사람이 변화하지 않고 성장하지 않는다면 삶이 비루해진다. 사람마다 성장이라는 의미를 다르게 간직하고 있을 텐데 나에게도 이 성장이라는 것은 시기마다 의미가 달라진다. 지금의 나에게 그 의미를 묻는다면 자유다. 나의 한계를 수용함과 더불어 더 나아져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의 자유, 타인의 삶을 기준으로 나를 살게 하지 않는 마음의 자유가 생겼다. 간단하게 말해서 놓을 줄 알게 되었다. 놓았다는 것은 포기했다는 말이 아니다. 접근 방식이 달라졌다는 의미다. 해내야 하는 일은 이제 없다. 다만 스스로 하고자 하는 모든 일들은 그저 사랑하는 나의 인생에 대한 예의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