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아야 보이는 사진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한 수다 - 사진
눈을 감아야 보이는 사진들을 몇 장 간직하고 있다. 이젠 아주 오래되어버린 어느 날의 눈 부셨던 찰나가 담겨 있는 사진들이다. 나밖에 볼 수 없는 이 사진들이 보여질 수 있을지 걱정이 되지만 그래도 한 번 소개해보겠다.
열네 살, 중학교 교복을 입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반마다 배정된 청소 구역이 있었고 우리 반은 교문 옆의 작은 화단 청소를 담당하고 있었다. 하늘은 맑았고 공기는 따뜻했던 그날 화단 청소를 맡았던 서너 명이 빗질을 끝내고 물청소를 하려던 참이었다. 수도꼭지엔 호스가 연결되어 있었고 나는 그 호스를 들어 물을 세게 틀고 호스 끝을 납작하게 눌렀는데 그 순간, 장난기가 발동해서 화단으로 향하던 호스의 방향을 돌려 친구들에게로 시원하게 물세례를 날려주었다. 친구들은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도망을 갔고 그런 서로의 모습을 보며 숨이 넘어갈 듯 깔깔대며 웃었다. 이내 다른 친구에게 호스를 빼앗겨서 복수의 물줄기는 나를 향했고 우리는 사이좋게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쫄딱 젖었다.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데도 좋아서 웃고 있는 모습이 너무 행복해서 사진 한 장 찰칵.
열여섯 살, 방과 후 마음 맞는 친구들끼리 학교에 남아서 피구를 즐겨했던 때가 있었다. 교복 치마를 입고 행여나 공에 맞을까 마음 졸이며 아슬아슬 피하는 묘미를 즐겼다. 빨리 날아오는 공에 대한 공포가 있었던 나는 상대가 던지는 공을 받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하고 오로지 잘 피하는 것에만 최선을 다하는 겁쟁이였다. 그런데 어느 오후 한창 요리조리 피해 다니며 명을 이어가고 있는데 저쪽 100m 거리에 짝사랑하고 있던 선생님께서 걸어오시는 게 아닌가. 참 희한하지. 그 선생님을 발견한 이후 내게는 초능력이 생겨서 생전 하지 않았던 행동을 하게 되었는데. 상대방이 위협적으로 던지는 공을 향해 힘차게 발을 구르고 하늘 높이 점프를 해서 공을 낚아챘다. 늘 해오던 행동이라는 듯 능수능란하게 공을 잡아 끌어안으며 멋지게 착지해서 자연스럽게 공격으로까지 연결하는 모습이란! 도대체 나의 이런 초능력은 어디 숨어 있다가 결정적 순간에 발휘되었던 것일까. 선생님 시선을 의식하며 멋지게 튀어올라 공을 낚아채는 내가 찍힌 그 사진은 수 십 년이 흐른 지금도 내 인생의 불가사의로 남아있다.
열아홉 살 여름. 쉬는 시간이었고 갑작스러운 비가 내렸다. 시원하게 쏟아지기 시작한 빗소리에 아이들이 비 구경하느라 복도 바깥 테라스로 몰려나왔다. 수험생의 하루라는 것이 늘 공부밖에 없고 매일 반복되는 지루한 시간의 연속인데 그 비가 수험생들의 일상에 약간의 변주를 해주었달까.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세차게 퍼부어대는 비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비를 보고 같은 기분을 느끼는 친구들이 있다는 게 그 순간 행복한 기분이 들어 사진 한 장 찰칵 찍어 두었다.
오래 기억에 남는 아름다운 장면들은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온다. 불쑥 찾아와 우리를 행복으로 뒤흔들어 놓고 사라져 버리는 순간들을 붙들고 싶어서 사진을 찍는데 사실 정말로 간직하고 싶은 찰나는 사진에 담을 수 없더라. 인화지에 기록되지 못하고 내 기억 속에 저장할 수밖에 없는 이 사진들도 시간이 지나니 색이 바래고 형태도 흐려져 간다. <꿈을 찍는 사진관>이라는 동화에서는 꿈을 사진으로 찍을 수 있다는데 우리 마음속에 있는 추억도 다 바래서 사라져 버리기 전에 인화해서 저장해 둘 수 있게 된다면 어떨까. 사진 속 어린 나는 티 없이 맑게 웃고 있는데 그 사진을 손바닥으로 쓸며 바라보는 내 눈엔 눈물이 맺힐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