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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성 Sep 14. 2021

처음은 단 한번 뿐이라 귀한 거야

'나는 지금도 그 독자들 중의 한 사람이고 싶다. 길거리에서 이 조그만 책을 열어본 후 겨우 그 처음 몇 줄을 읽다 말고는 다시 접어 가슴에 꼭 껴안은 채 마침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정신없이 읽기 위하여 나의 방에까지 한걸음에 달려가던 그날 저녁으로 나는 되돌아가고 싶다. 나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 이 <>을 열어보게 되는 저 낯 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 '


처음은 단 한 번이다. 카뮈도 그르니에의 <섬>이 정말 좋아서 어느 한때는 매일 같이 읽었을 테지만 처음 그 책을 읽었던 순간의 충격적인 좋음은 결코 두 번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 처음의 순간을 마주한 낯 모르는 젊은이들이 얼마나 부러웠을까.     


첫 경험의 충격들은 내 삶을 행복한 것으로 만드는 가장 영양가 높은 양식이다. 현재의 나를 행복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에 일조했던 것들과 처음 만났던 순간들이 있다. 이를테면 처음 커피를 마셨던 날이 있었을 것이다. 열일곱 고등학생이 된 때였고 아침 자율학습 시간에 꼬빡 졸아서 잠을 쫓으려고 교실 옆 자판기로 향했다. 작은 종이컵에 절반이 채워진 밀크커피 한 잔을 뽑아 들었던 그 순간 왠지 어른이 된 듯 야릇한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그날 이후 하루 커피 한 잔은 일상이 되었고 매일 커피를 마실 때마다 행복감에 젖는다. 하지만 커피를 처음 마셨던 그날의 설렘과 오묘한 기쁨은 단 한 번만 느낄 수 있는 기분이었다.  

    

책으로 말하면 <데미안>을 처음 읽었던 순간이 유독 그랬다. <데미안>에는 밑줄 긋고 싶은 문장들이 많았다. 읽는 내내 감탄과 더불어 멈추어 생각해보게 되는 구절들이 많은 책이었다. 그중에서 데미안이 크로머에게 덜미가 잡히어 돌아온 날 이렇게 생각하는 구절이 있다.      


나는 내 구두에다 더러움을 묻혀왔다. 발 깔개에 문질러 닦아낼 수 없는 더러움이었다.’      


이 문장을 처음 맞닥뜨렸을 때 아찔했다. 처음 엄마에게 거짓말을 했던 열 살의 내가 떠올랐고 그때의 기분을 들킨 것 같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인생에서 악에 (거짓말이 되었든, 물건을 훔쳤든, 욕을 했든지 하는 금기시되어있었던 무언가를 저지르는 것) 첫 발을 내디뎠던 순간들이 누구에게나 있고 그 순간의 두려움이나 죄의식에 사로잡혀 괴로웠던 경험들을 가지고 있다. 그런 보편적인 정서를 어쩜 저렇게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을까 하는 감탄을 했다. 이후에도 여러 번 다시 읽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경탄을 담아 밑줄을 그었던 수많은 문장들이 여전히 좋기는 하지만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충격적 좋음은 더 이상 없었다. 내 세상에 없던 문장을 처음 만났을 때 느낄 수 있는 충격과 기쁨은 오직 단 한 번 주어지는 것이다. 그 문장들을 내 행복의 창고에 들여서 한 자리 내어주고 때때로 꺼내 보는 즐거움을 누리고는 있지만 그래도 그 문장을 처음 창고 안에 들일 때의 행복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립다  결코 두 번 없을 첫 경험의 순간들이.     


그래서 무언가와의 처음을 계속 갈구하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를 예기치 못한 아찔함으로 인도하는 처음들이 너무 좋다. 그들과 친해져서 내 인생의 어느 한켠을 그들에게 내어주고 자주 만나고 싶다. 그런 음악을, 그런 문장을, 그런 그림들을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 콩닥콩닥 가슴이 뛰는 기분을 느끼고 싶다. 가슴 가득 행복이 들이차서 하루 종일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나지 않는 충만함을 만끽하고 싶다. 그리고 그것과 평생을 함께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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