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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성 Nov 30. 2023

이럴 줄 알았다면  더 자세히 써 둘 걸 그랬다

간직하고 있는 일기들을 나의 역사책이라고 말한다면 나의 역사는 열여덟에서 시작된다. 열아홉은 공백으로 남아있고 스물이 되어 대학 입학과 동시에 다시 쓰이기 시작했다. 대학 4년 동안 1년에 한 권씩 쓴 다이어리가 나의 기록된 역사들 중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스무 살 이후로 여섯 번의 이사를 하는 동안 짐을 싸면서 한 번, 짐을 정리하면서 또 한 번 묵은 짐들을 정리했다. 여섯 번의 버려질 위기를 무사히 넘기고 살아남은 사사로운 나의 기록들은 지금도 여전히 책꽂이 한편을 차지하고 있다. 가지런한 글자들이 보석처럼 빼곡하게 박혀있는 다이어리에는 기쁘고 슬프고 아프고 그리운 20대의 내가 여전히 반짝이고 있다.

    

1997년 6월 29일
문학기행을 다녀왔다. 하루종일 J선배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찼다. 집에 와서 삐삐를 확인했는데 선배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좋아서 세 번을 듣고 장기보존 해두었다. 이런 감정이 어떤 건지 잘 모르겠다. 선배를 이성으로 좋아하는 건지 새롭고 신선한 만남에 대한 호기심인지. 아무튼 선배가 너무 좋다.  

   

스무 살에 처음 삐삐를 샀다. 통신사에 가입해서 015로 시작하는 번호를 받았다. 삐삐는 할 말을 녹음해서 보내는 일방통행이어서 실시간 대화가 가능한 전화 통화와는 다른 매력이 있었다. 전화 통화는 부담스럽지만 안부는 전하고 싶은 애매한 상황에서 요긴했다. 할 말은 없지만 답신을 기대하며 의미 없는 말을 남겨도 괜찮았다. 말 대신 음악을 녹음해 마음을 전하는 낭만도 있었고 발신인 번호를 대신하는 약속된 숫자로 메시지를 전하는 재미도 있었다. 차마 말로는 전할 용기가 나지 않는 마음을 알쏭달쏭한 숫자들에 숨겨 표현하기도 했다. 거실에 놓인 전화기에 전화를 걸어 ‘안녕하세요 저는 00인데요 00 집에 있나요?’라고 해야 하는 뻘쭘함에서 해방되었다. 가족과 공유하지 않아도 되는 나만의 공간에 목소리들이 쌓여갔다.   

   

스무 살의 기록들은 온통 J선배에 대한 얘기들로 가득하다. 지독하게 강렬했던 짝사랑이었던지라 그의 말 한마디, 눈빛 한 번으로 하루의 의미가 결정되던 때었다. 행여나 그에게 삐삐가 오기라도 하면 그의 메시지를 확인하러 공중전화까지 가는 길이 마치 구름 카펫 길을 걷는 듯 기분이 붕 떠올랐다. 빨리 확인하고 싶은 마음과 아껴 듣고 싶은 마음 사이 어딘가에서 삐삐 번호를 누르고 한 마디도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수화기를 귀에 바짝 가져다 댔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를 몇 번이고 듣고 또 들었다. 지금도 ‘다시 듣고 싶으시면 1번..’이라는 안내음이 들리면 애틋하게 누르던 1번들이 생각난다. 특별한 의미도 없는 메시지를 조사까지 외울 정도로 듣고서도 그의 목소리를 차마 사라지게 내버려 둘 수 없어 장기보존함에 저장해 두고 습관처럼 꺼내 들었다. 삐삐가 영원히 그의 음성을 보존해 줄 거라고 믿었다. 삐삐의 생명력이 그토록 짧을 줄 알았다면 그의 목소리를 한 자 한 자 글자로 바꾸어 일기에 써두었을 텐데. 그랬더라면 일기를 꺼내 읽는 재미를 두 배로 부풀릴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1999년 8월 16일
드디어 폰을 마련했다. 혼자 학교 가서 책 빌리고 머리 염색을 했다.     


우리 중에서 휴대폰을 가장 먼저 샀던 건 정인이었다. 대학교 2학년이었고 주변에 휴대폰을 쓰는 사람보다 삐삐를 쓰는 사람이 아직은 더 많았던 1998년이었다. 정인이는 우리들 중 유일하게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휴대폰을 살 여유가 있었다. 그녀는 우리 사이에서 가장 세련되고 트렌드를 아는 친구여서 당시의 최첨단 신문물이었던 휴대폰이 그녀의 패션 소품으로 잘 어울렸다. 하지만 좀 의문스럽기는 했다.

‘우리에겐 충분히 신속하고 지극히 은밀한 삐삐가 있는데 왜 휴대폰이 필요하지?’

물어보진 않았다. 정인이도 설명하지 않았다. 사실 설명이 굳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유행을 살짝 앞서가는 사람들은 필요해서가 아니라 소유하고 싶은 욕망과 그것과 함께 있는 나의 이미지에 대한 기대로 물건을 사기도 하니까. 휴대폰은 충분히 유혹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대답이 궁금했다. 왜 그렇게 서둘러 휴대폰을 샀던 건지 물어보고 싶어 져서 전화를 걸었다.

      

“정인아 우리들 중 휴대폰을 처음 샀던 게 너였지?”

"그랬지. 한화 G2.” 그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어머나! 모델명까지 기억하는구나.”

“어제 일은 기억이 안 나는데 옛날 건 다 기억이 나더라. 그다음에 샀던 건 모토로라였어.”

“맞다. 그건 나도 기억나. 그런데 있잖아 그때 휴대폰을 왜 샀던 거야?”

“그때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잖아.”

“응 그랬지.”

“아르바이트하는 데서 만난 애들이 다 가지고 있더라고. 멋있어 보이더라. 길 가면서 전화 통화 하는 것도 어딘가 있어 보이고 말이야. 아르바이트를 하니까 돈도 좀 여유가 있어서 샀던 거지 뭐. 그런데 별로 쓸모가 없었어.” 간단명료한 대답이 그녀의 담백한 성격 그대로다.

“그랬을 것 같아. 그땐 아직 삐삐를 더 많이 쓸 때였으니까. 나는 지금도 삐삐의 시대가 조금 더 길었더라면 하고 아쉬워하거든.”

“너는 2년 반 정도 썼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응 삐삐에 얽힌 좋은 추억이 많기도 하고. 너는 삐삐 하면 생각나는 추억 같은 거 뭐 없었어?”

“하나 있어. 어느 날 밤에 자려고 누웠는데 삐삐가 온 거야. 번호를 봤는데 5148635라고 찍혔더라고. 다음 날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받으셔. 그런데 그 아주머니는 삐삐를 보낸 사람이 없다고 하시더라고. 너는 어떤 상황이었을 것 같아?”

“너를 몰래 좋아하는 그 아주머니의 아들이 전화번호를 남긴 거 아니었을까?”

“아니. 그게 전화번호가 아니었어. 전화번호 패드에서 5148635를 연결하면 하트 모양이 되더라. 누가 보낸 건지는 모르지만 여운이 오래갔어.”

“어머나, 정말 로맨틱하다. 이러니 삐삐의 시대를 그리워하는 거야.”     


정인이가 휴대폰을 사고 꼭 1년 후에 나도 첫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휴대폰과 이동통신사 사업이 막 확장되던 시기라 통신사에 가입하면 휴대폰 가격을 100% 정부가 보조해 주던 때였다. 이동통신사 대리점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고 나레이터 언니들이 가게 앞에서 춤을 추며 새로 나온 휴대폰을 홍보했다. 기계 값이 공짜였기 때문에 휴대폰을 향한 마음이 활짝 열렸다. 필요가 있니 없니를 따질 이유가 없었다. 너도 나도 삐삐를 버리고 휴대폰을 선택했고 그렇게 본격적인 휴대폰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휴대폰에 마음이 빼앗겨서 삐삐는 서랍 깊숙이 넣어두고 까맣게 잊어버렸다. 내 휴대폰의 역사는 그렇게 내 마지막 삐삐의 영면과 함께 시작되었다.  

    

휴대폰은 한 번도 뒤로 물러난 적이 없다. 아주 빠르게 변했고 mp3를 잡아먹고, 카메라도 잡아먹으며 내 손 안의 만능 가제트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했다. 휴대폰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며 살았다. 그러고 보니 손때 묻은 물건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놓아버릴 생각을 했을까 싶다. 이전에 쓰던 휴대폰을 지금도 몇 개 가지고 있다. 20년도 더 된 다이어리들처럼 나의 역사에서 어느 한 시기를 기록하고 있는 것들이어서 함부로 버리기가 뭣했다. 영면한 듯 보이는 낡은 휴대폰에 충전기를 꽂으면 액정에 불이 들어온다. 그걸 확인하는 기분이 묘하다. 꼭 타임머신을 탄 것 같은 기분이 든달까.

     

꺼내 볼 것들이 많아 다행이다. 삶에서 잊힌 순간들이지만 사라지지 않고 거기 있어줘서 함께 이야기하고 웃을 수 있었다. 지금의 순간을 조금 더 자세히 남겨두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10년 후, 20년 후의 나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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