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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성 Oct 24. 2023

르세라핌이라는 이름의 충전기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산더미처럼 쌓였기 때문에 더 하기가 싫어진다. 쌓인 일들 중 무얼 먼저 시작해야 좋을지 생각하는 것부터가 이미 일이 되어 버려서 모든 생각도 일시정지 해버린다. 게다가 일을 끝내야 하는 제한 시간이 정해져 있다면 더 무기력해지고 만다. 이럴 때마다 이명처럼 맴도는 문장이 나를 더 괴롭힌다. ‘해야 하는 일이 먼저고 하고 싶은 일은 그다음이야.’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을 때 먼저 사회생활을 시작한 선배의 다정한 조언이었다. 새끼 오리가 알을 깨고 나와 가장 먼저 본 존재를 엄마로 각인하고 따라다니는 것처럼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내게 그 문장은 사회생활 만능 치트키인 양 머릿속에 새겨졌다. 각인이 무서운 게 공적인 업무가 아니라 사소한 개인의 일을 처리할 때도 습관처럼 주술이 작동한다는 거다. 예를 들어 글쓰기 숙제 마감일이 정해져 있는데 숙제를 끝내기 전에 책이라도 읽으려고 하면 ‘해야 하는 일이 먼저고....’가 떠올라 버린다. 그러니 해야 할 일이 많은 날은 ‘하기 싫음’과 ‘하기 싫은 걸 먼저 끝내야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음’ 사이에 끼여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무기력의 감옥에 갇혀 버린다. 일은 하지 않으면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최악의 시간이 흐른다. 하기 싫다고 발버둥을 쳐도 시간은 흐르고 있다는 사실에 더 괴롭다. ‘왜 나는 그냥 하면 되는 일을 이토록 미루고 있는가’ 자책하면서도 일을 시작할 생각은 여전히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라는 인간이 최소한의 책임감은 있는 사람인지라 결국은 그 모든 일들을 말끔히 제시간에 끝내리라는 건 안다. 문제는 무기력하게 널브러져 있는 내게서 어떻게 즐겁게 일하는 나를 다시 끄집어낼 것인가 하는 거다. ‘해와 바람’의 우화에서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건 사나운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해였던 것처럼 다정하게 나를 달래서 제 발로 일어나 움직이게 만들어야 한다.    

 

k-pop 걸그룹 영상을 켠다. 이번엔 르세라핌의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다. 중독성 있는 음악에 빠져들었고 세련된 안무에 매료되어서 한창 즐기고 있는 곡이었다. 이 곡의 무대 영상 중에서 무대 의상이 가장 마음에 드는 영상을 고른다. 화면을 키우고 화질은 선명하게 볼륨은 높인다. ‘I’m a mess mess mess mess~’ 하고 음악이 시작되면 다섯 명의 멤버들이 일제히 동작을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한다. 팔다리를 시원시원하게 나풀거리며 걸크러쉬를 발산한다. 한 박자도 쉬지 않고 움직이면서 표정까지 야무지게 연기해 한치의 여백도 없는 꽉 짜인 무대를 연출한다. 멤버들이 돌아가며 한 사람씩 센터로 들어와 자신의 파트를 뽐내고 다시 무리 속으로 들어가기를 반복한다. 그들의 동선을 쫓느라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인다. 화려하면서도 절도 있는 무대에 압도되어 눈도 깜빡이지 않고 숨도 멈춘 채 몰입한다. 노래와 안무가 어쩜 이토록 조화로울까 감탄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제 몫을 완벽히 해내는 프로페셔널에 반한다. 그들의 ‘잘함’이 나를 홀린다. 불과 5분 전까지도 나를 괴롭히던 스트레스는 흔적도 없이 달아나고 머릿속은 순식간에 감탄으로 가득 찬다. 하지만 이 감탄은 화려하고 완성도 높은 무대 자체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생텍쥐베리가 말하지 않았던가. 진짜 감탄은 무대 그 이면에 대한 상상에서 비롯된다. ‘고작해야 스무 살 전후의 아이들이 무대에서 3분 남짓한 노래 한 곡을 표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을까.’에서부터.    

 

다섯 소녀들의 무대를 보고 있으면 그녀들의 시간이 보인다. 보기엔 더없이 이쁘고 화려하기 만한 청춘들이 이 불확실한 꿈을 좇으며 얼마나 간절했을까. 팀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해 얼마나 많은 낮과 밤의 시간을 노래하고 춤을 추며 보냈을까. 아무리 즐겁게 추는 것이 춤이라지만 마냥 즐겁기만 했을 리 없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더 이상 팔이 올라가지 않을 때까지 연습했을 것이다. 저렇게 어린 녀석들도 뭔가 해보겠다고 저토록 열심히 하는데... 까지 생각이 미친다. 생각이 여기까지 오면 이제 나는 일어날 준비가 된 거다. 보이지 않는 서사를 간직한 그녀들이 뿜어내는 에너지가 흐느적거리며 맥을 못 추던 나를 충전시켜 주었다. 내 속 깊숙한 곳에서 메말라 가던 열정에 촉촉하게 수분이 차오르는 게 느껴진다. 소녀들의 열심이 천 근 같은 몸과 무기력한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늘어져 있던 몸을 추슬러 자리에서 일어난다. 르세라핌의 여섯 번째 멤버라도 된 듯 음악에 맞추어 팔과 다리를 휘적거리며 책상 정리부터 시작한다. 어수선했던 공간을 말끔히 정리하고 다소곳이 앉아 펜을 든다. 포스트잇 한 장을 뜯어서 ‘할 일’이라고 쓰고 산더미처럼 쌓였던 일들을 하나씩 내려놓는다.


엄마는 우울할 때 자갈치 시장 상인들이 억세게 장사하는 모습을 보고 힘을 얻고는 했다고 말씀하셨다. 엄마의 자갈치 시장과 나의 르세라핌은 이음동의어다. 사람들이 열심히 사는 모습은 심장을 뛰게 하는 에너지가 있다. 몸을 움직이게 하는 건 결국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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