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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성 Sep 23. 2021

달라도 너무 다른 승희에게

안녕 승희야.

추석 즐겁게 보냈니? 보름달 보며 소원 빌었을까나? 나는 언젠가부터 달님에게 비는 소원은 딱 정해져 버리더라. ’건강하게 해주세요, 가족과 친구들 모두.’ 하고 말이야. 그게 제일 간절한 것이기 때문이지만 한편으로는 달님이 그 외의 소원은 잘 들어주지 않더라는 누적된 경험의 결과이기도 한 것 같아.     

     

나도 추석 잘 보냈어. 5일 내내 혼자 있고 싶다고 그렇게 외쳐댔는데 다 뻥이었나 봐. 가족들이랑 맛있는 것도 먹고 이쁜 카페에 가서 커피도 마시면서 한가로운 시간 보냈는데 참 좋더라. 명절을 지내는 형태가 많이 바뀌었지? 우리 집도 더이상 차례는 지내지 않기로 한 게 3년이 됐고 벌써 그 한가로움에 익숙해져 버렸어. 누구 하나 부엌에서 고생하는 사람 없이 맛있는 음식점에서 외식을 하고 경치 좋은 카페에서 모두 똑같이 기분 좋게 웃으며 이야기 나누는 이런 명절 참 마음에 드네.          


가족들이 모이면 어릴 적 이야기 꼭 하게 되잖아. 서로가 기억하는 부분이 달라서 짜맞추는 재미도 있고 어린 시절의 기억과 추억을 똑같이 나누어 가진 사람들끼리의 진한 유대감도 느껴지는 이야기들 말이야. 그런 이야기들 중에 이번엔 좀 놀라운 내용이 하나 있어서 이야기해줄게. 초등학생 때 집안의 가훈을 알아 가는 숙제를 받은 적이 있었거든. 엄마한테 우리집 가훈은 무엇이냐고 물었지. 그랬더니 엄마가 조금 고민하시는 듯하더니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자‘가 우리집 가훈이라고 하시는 거야. 언제부터 정직과 성실이 나도 모르는 우리집 가훈이었는지 조금 의심스러웠지만 당당하게 화선지에 붓글씨로 곱게 써서 숙제를 완성했던 날이 있었어. 그런데 말이야 엄마가 순식간에 결정한 그 가훈이 그날부터 쭉 내 삶에 은근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언니에게 했거든. 그런데 언니 역시도 그랬다는 거야. 정직과 성실이라는 단어가 마치 주술처럼 머릿속에 박혀서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삶의 지침이 되어왔다고 말이야. 그리고 이만큼 살아오면서 보니 정직과 성실, 그 이상 중요한 게 뭐 있나 싶을 만큼 삶에 있어 가치 있는 덕목들이었다는 생각을 꾸준히 했다는 말을 덧붙였어.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언니도 똑같았다고 하니 소름이 좀 끼치더라. 말(글)의 힘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삶을 통해서 생생히 체험하고 있는 것 같아.           


말(글)의 힘이라는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할 얘기가 있어. 너가 며칠 전에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책>을 읽고 참 좋다며 필사해서 보내준 문단이 있었잖아.         

  

’움직이는 것은 살아 있고, 말해지는 것은 살아남는다. 너무나 잘 묘사되었기에 사실성이 떨어진다는 말은 옳지 않다. 생각이 편협한 평론가들은 어떤 시는 길게 운율을 맞추지만 결국은 아름다운 날이라고 말하는 글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아름다운 날이라고 말하기도 쉽지 않거니와 아름다운 날은 곧 지나가 버린다. 그 아름다운 날을 미사여구로 꾸민 기억 안에 잘 보존하여 순식간에 흘러가 버리는 저 공허한 세상의 들판과 하늘에서 새로운 꽃과 별로 빛나게 하자.‘      


나는 얼마 전 너가 쓴 <함께 하는 상상>이라는 글에서 페소아의 글이 딱 떠오르는 문장을 발견했어.


 ’현실 빠진 상상은 동여매지 않은 풍선 같아서 통통 튀다 금세 땅으로 떨어지며 볼품없이 쪼그라들었다.‘


묘사나 비유를 하더라도 좀 억지스럽게 느껴지는 글들이 있어. 예전에는 그런 글들을 작가의 입장에서 헤아려보려고 애를 썼단 말이지. 그런데 글을 진지하게 읽었는데도 의미를 잘 전달받지 못했다면 그건 작가에게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어. 그런 맥락에서 ’동여매지 않은 풍선‘은 현실성을 갖지 못한 내 꿈이 날아갈 방향을 잃고 이리저리 나부끼다 찌그러지는 풍선의 모습과 너무나 닮았구나 싶더라고. 마음에 쏙 들었어. 너가 새벽마다 한계를 시험당하는 나홀로 문장 만들기 훈련은 아마도 잘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고 꼭 말해주고 싶었어.       

   

그리고 페소아가 말하는 ’미사여구’라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이 좀 복잡한데 그것의 필요나 효용에 대해 의심이 좀 있어. 글의 내용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정도는 좋은데 작위적인 느낌이 묻어나는 수사들은 좋아하지는 않는 것 같아. 저울로 잰 듯 딱 정량의 단어들로 문장을 꽉 채운 글은 숨이 좀 막히고 그 정량을 맞추기 위해 배치된 듯한 수사들은 너무 잘 계산되어서 자연스럽지 못하더라고. 맞아. 문제는 미사여구가 아니라 그 미사여구들로 뭔가를 하려는 티가 났느냐 나지 않았느냐의 차이야. 정말 있어야 할 자리에 잘 들어앉아 있는 아름다운 문장들을 만나면 정신 못 차리고 좋아하기도 하니까. 그래서 페소아의 글에 대한 공감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들렌을 경험해본 후로 미루어두기로 했어.          


지난 편지에서 생각했던 것과 조금 다른 양상으로 우리의 편지 쓰기가 전개되고 있어서 당황스럽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하다고 했었잖아. 미리 계획하는 걸 좋아하는 너인데 서간문은 그런 계획들이 지켜지기엔 다소 한계가 있으니까. 일방적이어서는 안 되고 양방향으로 오고 가야 되는 글이다 보니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로만 채워갈 순 없지. 너의 이야기들에 힘껏 귀를 기울이면서 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도 자연스럽게 풀어내야 하고. 나 역시 쉽지 않지만 나는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글을 쓰는 스타일은 아니니까 해오던 거랑 크게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너의 말처럼 ’천장을 보고 누운 채 물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몸을 맡기고 유영하는 느낌‘으로 하고 있어. 너는 미리미리 계획파, 나는 어느 날 갑자기 기분파. 글을 쓰는 것을 비롯해서 우린 수없이 많은 다름을 가지고 있지만 이건 분명해. 같이 하는 모든 것을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 각자의 방식으로.           


아, 꼭 답을 하라 했던 질문이 있었지. ’문득 남을 생각하다가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서간문의 본질’ vs ’자기만 생각하던 사람이 문득 남을 돌아보게 되는 과정‘ 어느 쪽이냐고? 그런데 답을 하기에 앞서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어느 쪽을 선택하든 너는 반드시 그 반대쪽에 서 있을 것 같다는. 정말 그랬는지 꼭 알려주기 바래. 그리고 이거 엄청 어려운 숙제였어. 나는 아무래도 후자 쪽이 아닐까 싶어. 그리고 이번 추석 연휴에 <환상의 빛>을 읽고 보았어. 그 얘기까지 하려니 편지가 너무 길어진다. 일단 소식만 전해 두고 소설과 영화에 대해 던져준 작은 질문들은 다음 편지로 미루어야겠다. 그럼 다음 편지에서 남은 이야기는 마저 하도록 하고 오늘은 이만 총총.           


2021.9.23.

추석 잘 보내고 행복이 충만한 은성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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