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차를 끓이기 시작했어. 여름에는 물 끓이는 열기도 감당이 안 되고 끓여 놓은 물도 쉽게 상해서 한동안 끓인 물을 먹지 않았는데 아침 공기가 차가워지니 저절로 따뜻한 보리차 생각이 나더라. 온기가 필요해지는 때가 되어가고 있어. 여름 한 철 잘 깔고 덮었던 얇고 거친 이불들도 정리해서 넣고 도톰하고 부드러운 이불로 바꾸었어. 독립하기 전에는 그런 것들에 신경 쓰지 않았었거든. 엄마가 해주시는 밥을 먹고, 엄마가 바꿔주는 이불을 그냥 덮었어. 삶의 가치를 공부 하는 것, 책 읽는 것 혹은 돈을 버는 것에 두고 그 외의 것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그런데 직접 살림을 하고 보니 진짜의 삶은 매일 보리차를 끓이는 것에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말 그대로 ‘살림’이잖아. 나를 살게 하는 것들이 지금까지는 정신적인 것들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구나를 생각하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 끼니를 장만하는 것, 입을 옷을 세탁하는 것, 집을 깨끗이 정돈하는 일상 속에 나의 진짜 삶이 있었구나 싶어.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서 레빈이 농부들이랑 함께 땀 흘리면서 농사를 짓잖아. 사람들은 농사짓는 일은 소작농들에게 맡기고 정치나 행정을 돌보는 일 같은 더 ‘큰 일’을 하라고 하지만 그는 그런 일들보다 직접 낫을 들고 농사를 짓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렇게 땀 흘려 일하는 것의 가치를 알고 그 일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 존중하는 마음이 있잖아. 농사일을 하고 땀 흘려 일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먹을 끼니를 차려내고 단정하게 입을 옷을 세탁하고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주변을 청결하게 유지하는 일들이 레빈이 농사일을 대하는 마음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곤 해.
같은 맥락에서 선명하게 파란 치마를 입은 여인이 부엌 창가에 서서 우유를 따르는 그림 있잖아. 베르메르의 <우유 따르는 여인> 말이야. 그녀의 치마에 칠한 파란색 물감이 얼마나 고가의 물감이었는지, 베르메르가 이 그림에서 빛을 어떻게 표현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만났던 그 훌륭한 그림이 이제야 진정한 나의 명화가 되었어. 우유를 따르는 그 행동이 매일의 끼니를 마련해서 나를 먹여 살려야 하는 일상의 모습이구나, 이 모습이야말로 우리 삶의 진짜 모습이었던 거구나, 하면서 이 그림 한편을 마음속에 들여놓았거든.
이런 거 너무 좋지 않아? 책을 읽어도 시간이 지나면 다 잊게 되잖아. 한 번 읽은 책을 두 번 세 번 다시 읽어보는 일도 드물고. 그림도 그래. 위대한 그림이라고 하는데 요리조리 살펴봐도 감흥이 오지 않는 그림 많잖아. 그런데 내 삶을 들여다보다가 좋아했던 책의 어느 한 장면이 떠오른다거나 왜 명작인지 이해하지 못했던 그림이 떠오르는 그런 경험들 말이야. 다 잊은 줄 알았는데 나도 모르게 영향받고 있었구나 싶기도 하고 책을 쓴 작가와 뭔가 공감대가 형성된 것 같기도 해서 은근히 기분 좋아져. 이런 맛에 또 책을 읽고 공부도 하고 그러는 거야 우리, 그지? 게다가 보리차 한 주전자 끓이다가 생각이 톨스토이, 베르메르까지 뻗어나가더라는 이야기를, 그리고 그들이 떠오르는 이 경험들이 너무 좋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화룡점정. ‘나도, 나도’ 하고 맞장구 쳐주고 더 설명하지 않아도 그 기분 똑같이 느낄 수 있는 너가 있어서 정말 좋아. 너 없었다면 이야기하기 좋아하고, 이야기하면서 에너지 얻는 나는, 정말 시들어 빠진 시금치 같은 모습으로 나이 들어갔을 거야.
황현산의 산문집을 읽고 좀 더 역사적인 시간을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충만해져 있다고 했지? 황현산 산문집들은 몇 번 시도하다가 본격적인 시작을 미뤄두고 있는 책이야. 그분 책은 좀 묵혀두게 되는 그런 무언가가 있는 건가? 글을 읽다 보면 그 글을 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잖아. 글에 담긴 정신이 좋고 글을 쓰는 태도에 배울 점들이 많아서 스승 삼고 싶은 책을 자주 만날 수 있는 건 아닌데 그런 책을 만났구나. 부러워. 물론 기본적으로는 좋은 책이기 때문에 너에게 그런 감흥을 불러일으킨 것이겠지만 지금의 너의 마음가짐이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그런 마음의 변화가 일어난 거라고 생각해. ‘준비된 자가 기회를 잡는다 ‘라는 맥락에서. 같은 책을 읽어도 그 책이 내 것이 되는 때라는 것이 있더라. 나는 조금 더 기다려봐야겠어.
나는 제일 좋아하는 영화, 제일 존경하는 작가 같은 ’내 인생의 000‘은 거의 없는 것 같아. 어느 한 시기에 정신없이 좋아하는 무언가들이 항상 있을 뿐이고 시간이 지나 또 다른 좋은 것들이 생기면 이전까지 좋아했던 것들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잊어버리고 말거든. 뭔가 하나를 딱 정하기엔 세상에 너무 많은 좋은 것들이 있어서 앞으로도 확고한 ’내 인생의 000‘은 없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또 모르지 뭐. 그래도 거창한 타이틀을 부여하진 않았지만 내 인생의 책 한 권이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면 이 책을 말해야겠다고 생각해둔 건 있어. 일본의 개그맨 시마다 요시치라는 사람이 쓴 <대단한 우리 할머니>라는 책인데 이 책 속의 할머니를 정말 존경하고 있거든.
“할머니, 난 영어를 잘 모르겠어."
”그럼 답안지에 <나는 일본인입니다>하고 쓰면 되지.”
”근데 할머니, 난 한자도 잘 못써.“
”<나는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만으로도 잘 삽니다>하고 쓰면 되지.“
”근데 난 역사도 잘 못해.“
”역사도 못해?“
”답안지에 <과거에 연연해하지 않습니다>하고 쓰면 되지.’
이 할머니처럼 말랑말랑하게 살고 싶어. 그렇게 살면 그런 글을 쓸 수 있겠지. 나는 유쾌한 사람이고 싶고 유쾌한 글을 쓰고 싶거든. 유쾌한 사람이 되는 것이 먼저고 그러면 글은 자연스럽게 따라오지 않을까? 항상 생각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쉽지 않겠지.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나를 만들어간다는 것이. 그래도 생각은 그렇게 하고 있으려고 해. 생각과 시간의 힘을 좀 믿어보려고.
나 편지만 쓰면 왜 이렇게 길어지지? 이만큼을 써도 왜 항상 다 못한 이야기들이 남느냔 말이야. 정말 수다쟁이인가 봐. 이번 일요일에 만나기로 했으니 남은 이야기들은 만나서 하자. 이번엔 J도 함께여서 세 배로 즐겁겠지? 기대된다.
붙임)
오늘도 다른 이야기들을 실컷 하다가 <환상의 빛>을 놓쳐버렸네. 간단하게 감상을 전할게.
서사가 아니라 감정선을 따라가야 하는 소설과 영화여서 쉽진 않았어. 소설도 영화도 시적이라 오랜만에 그런 느린 속도감이 좋더라. 자살의 이유를 알았다면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조금 쉬웠을까?라고 물었었지.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 그나마 일말의 이해의 여지라는 것이 있을 수 있으니. 그리고 이유가 없는 죽음은 그 죽음의 가치가 너무 하찮아져 버려서 사랑하는 이의 목숨이 그렇게 하찮게 버려졌다는 것, 그렇게 하찮은 이유로 자신이 버려졌다는 것은 참기 힘든 고통일 것 같아. 아무런 이유도 없이 죽음을 선택했다면 그에게 나는 도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하는 물음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 같아. 비참하고 고통스럽겠지.
굳이 말을 하자면 소설 쪽에 더 마음이 가더라. 원작을 좋아하면 영화를 보고 실망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지 않았어. 고레에다 감독의 다른 영화도 궁금해졌어.
2021.10.1.
10월의 첫날이 좋은 은성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