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파가 찾아온 10월 중순의 새벽이야. 날씨 검색을 해보니 5°, ’어제보다 12° 낮음‘이라고 적혀있네. 하루 사이에 12°가 떨어졌어. ’몇 십 년 만의 더위‘, ’기상 관측 이래 최대 폭우‘, ’이상 한파‘ 같은 날씨 기사가 더 이상 놀랍지도 않을 만큼 기후 변화의 징후들이 잦아지고 있는 듯 해. 하지만 아무리 자주라고 해도 익숙해질 수는 없고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아쉬운 마음 반, 두려운 마음 반이 되는 것 같아. 일요일이라 도서관에 갈 계획인데 겨울옷을 꺼내 입고 가야겠어.
지난 편지에 썼던 버들나무가 한들거리는 호수 공원 옆에 도서관이 하나 생겼어. 새로 생긴 도서관은 아니고 다른 동네에 있던 교육청 관할 도서관이 이사를 한 거야. 이전하기 전의 도서관은 내 인생 최초의 도서관이었어. 곳곳에 내 청소년기의 추억들이 가득 묻어있었는데 이젠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어. 지어진 지가 오래되어서 좁고 불편했었거든. 그래서 좀 더 넓은 부지로 옮겨서 규모도 키우고 시설도 업그레이드해서 새로 지은 건가 봐. 내가 주로 다니는 시립도서관은 버스를 타고 20분을 가야 하는데 여긴 걸어서 갈 수 있고, 가는 길에 호수 공원 산책도 겸할 수 있으니 단골 도서관을 옮길 수 있겠다는 설레는 기대가 있었어.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면 다니던 도서관에 계속 다니려고 해. 새로 지어진 그 도서관을 가보니까 내가 왜 시립도서관을 그렇게 좋아했는지 확실히 알겠더라고. 우리가 함께 읽고 있는 책의 영향을 받기도 했고.
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에서 무라이 건축사무소가 현대 도서관 건축 경합을 앞두고 있잖아. 건축가들이 도서관을 설계할 때 어떤 것들을 고려하는지를 엿보는 재미가 있고 도서관도 목적에 따라 설계가 달라져야 한다는 걸 배우는 것도 좋아. 이유 없는 건 없는 거야. 작은 것 하나에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고 이용하는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세심하게 고려했느냐의 여부가 그 결과물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거였어. 전문가가 아니라도 건축물에 자주 드나들면서 이곳저곳 사용하다 보면 은근히 그런 세심한 배려들이 눈에 들어오잖아. 그리고 어떻게 이런 것까지 생각했을까 감탄하게 되고 말이야. 그런 흐름에서 11년째 다니고 있는 시립도서관이 더 좋아졌어. 나는 도서관에 가는 주목적이 책을 빌리는 게 아니잖아. 학습실에 앉아서 책 읽는 걸 좋아해.
시립도서관 학습실은 건물 꼭대기 4층에 있는데 전체가 부채꼴 모양이고 부채꼴의 직선 부분에 해당하는 양 벽면이 전부 유리로 되어있어. 한쪽은 산이 펼쳐지고 반대쪽은 도심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데 나는 산이 제일 이쁘게 보이는 위치의 4인용 책상 100번 자리를 VIP석으로 점찍어 두었어. 그냥 창으로 보이는 초록이 좋아서 그 자리를 선호했던 건데 소설을 읽다 보니 그 자리가 괜히 마음에 든 게 아니었구나 싶더라. 모든 게 건축가의 계산에 다 들어가 있었던 거야.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어 통창으로 보이는 산을 바라보고 있는 순간이 생각보다 되게 좋거든. 개방감과 아늑함은 공존하기가 어려운데 도서관 고유의 조용함이 아늑한 느낌을 담당하고 탁 트인 시야가 개방감을 맡아주는 덕분에 그 오묘한 조화의 혜택을 누리고 있지 않나 생각해. 짐작했던 것보다 여러 가지로 신경 많이 쓴 도서관이었구나 싶어 애정이 좀 더 커졌어. 소설에서 앞으로 도서관 건축 계획이 어떻게 전개될까 하는 기대감에 더해서 나의 단골 도서관의 매력을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할 것 같아.
도서관 얘기 너무 길게 해서 지루했겠다. 너는 요즘 애정 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이 생겼다고? 나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생각하는 놀라운 점이 있어. 우리나라 그렇게 크지 않잖아. 인구도 이웃 나라들에 비하면 많지 않고. 그런데 어쩜 그렇게 노래 잘하는 사람이 많은 걸까. 오디션 프로그램 종류도 정말 많은데 그 많은 프로그램에 나오는 노래 잘하는 사람들은 다 어디서 왔을까? 학교 다닐 때 우리나라는 지하자원이 없다고 배우잖아. 다른 나라는 석유도 있고 고무도 있고 나무도 많은데 우리나라는 사람이 재산이라고. ‘인적 자원’이 풍부하다는 거야. ‘인적 자원’이라는 말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맞는 말이었어. 우리는 사람 자원이 무궁무진한 나라 같아. 인구 대비 재능 있는 인재들이 참 많구나 싶어. 전 세계적으로 실내 생활이 반 강제된 요즈음, 집에서 OTT 서비스로 즐거움을 찾던 지구인들이 K드라마나 K영화에 열광한다는 기사를 보고 얼마나 뿌듯했는지 몰라. 지금도 <오징어 게임> 열풍이 대단하고. BTS의 인기는 말할 것도 없고. 그저 열심히 시청할 뿐인 사람이지만 내 가족이 사랑받는 것 같이 기분 좋더라. 자랑스럽고.
오디션 프로그램은 중독성이 있잖아. 안 볼 수는 있어도 한 번만 볼 수는 없지. 마음에 드는 참가자가 어떤 식으로든 생길 수밖에 없고 그 참가자가 다음 라운드로 갈 수 있을지 없을지는 꼭 봐야 하니까. 너는 누구를 응원하고 있을까? 나는 주로 어떤 참가자를 좋아하냐면 ‘성장‘하고 있다는 게 보이는 참가자.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보려고 애쓰는 게 보이는 참가자에게 가장 마음이 가더라.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는 재미가 거기에 있잖아. 그래서 처음부터 유력 1등 후보에게는 관심이 잘 가지 않더라고. 더 잘해보려고 애쓰다가 훌쩍 실력이 느는 포인트가 좋은 것 같아. 그런 참가자들의 모습에 나를 투영시키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해. 잘 하지 못하지만 끝까지 노력하면 결실을 얻을 수 있다는 걸 그들을 통해 확인하고 싶은 걸까 하는. 또 그런 사람들이 잘 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기도 하고.
그런데 그마저도 다 옛날의 취향들이 되어버렸어. TV를 안 본지가 꽤 오래되었으니까. 독립을 하면서 TV 없이 살기로 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야. 그렇게 좋아했던 TV 보기가 시들해진지 좀 오래되었어. 요일을 기억하고 시간 맞춰 TV 앞에 앉았던 마지막 프로그램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으니까. 나는 OTT 스타일하고는 잘 맞지 않는 사람이야. 내 시간이 날 때 언제든지 볼 수 있는 그 특성은 합리적이고 편리한 건 맞지만 재미는 없어. 그날, 그 시간에만 볼 수 있다는 제약이 그 프로그램에 대한 마음을 더 부풀리는 역할을 했던 것 같거든. 언제든지 볼 수 있게 되니까 시시해지더라. 다음에 보지 뭐, 하게 되고. 안 봐도 상관없어지고. 그렇게 조금씩 TV와 멀어지게 되었는데 요즘은 옛날 친구 그리워지는 것처럼 TV가 있는 쪽이 더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해. TV를 보면 여러 가지 감정들이 다녀가잖아. 웃고, 울고, 화나고, 감동하고. 그런데 생활에서 그런 것들이 없어지니까 감정이 단조로워져. 별로야.
너 수영 다시 시작한 지 한 달 정도 됐던가? 대학 다닐 때도 학교에서 수영을 했었고 그 이후에도 종종 다녔었지? 꾸준히 계속 한 건 아니어도 꽤 오래 하는 운동이네. 너랑 잘 맞나 보다. 다 좋아하는 일로만 스케줄을 짜도 어느새 시간에 쫓기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때가 있잖아. 뭐 때문에 이렇게 아등바등하고 있을까 싶을 때. 땡땡이치고 맛있는 아침 만들어 먹었다고 하니 잘했다 싶었어. 수영에서 해야 할 힘 빼기를 집에서 연습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나는 요즘 힘을 너무 빼고 있는 게 문제라면 좀 문제야. 책에 밑줄 긋는 얘기로 해보면 나는 좋아하는 문장에 연필로 밑줄을 긋는 걸 좋아하거든. 밑줄 그은 문장은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행복의 흔적들이야. 그런데 꽤 오래 밑줄 긋고 싶은 책을 못 만나서 그 갈증이 심해진 상태야. 뭔가 불만족스럽고 산만해져 있어. 기대를 가지고 산 책들에서 연이어 실망을 하니까 지치더라고. 그런 와중에 가뭄의 단비 같이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을 만나서 회복의 기미가 보이고 있어. 밑줄 긋기가 다시 시작되었거든. 다만 그 내용이 다소 침울해지는 면이 있어서 밑줄 긋기로 활기까지 회복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 어쨌든 밑줄 긋고 싶은 책을 만났다는 좋은 소식으로 편지를 마무리할게. 남은 이야기는 만나서 하기로 해.
갑자기 추워진 날씨야 건강 잘 챙겨.
2021.10.20.
힘 빼기가 주특기인 은성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