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은성 Dec 03. 2020

 홀가분

오늘의 기분을 글자로 표현하면 어떤 단어가 잘 어울릴까 생각해보니 '홀가분'이다. 이 낱말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할 때, 이를 악물고 견디고 있을 때. 그 일이, 그 상태가 끝나기를 기대하는 마음, 끝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어쩌면 끝까지 견디지 못하는 일이 훨씬 많아졌을지도 모르겠다.


인생 최초로 거대한 홀가분을 경험했던 순간은 수능 시험을 치른 후의 시간이었다. 너무나 당당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었던, 그러면서도 일말의 죄책감이나 불안을 느낄 필요가 없었던 몇 달의 시간. 시간이 흘러 경험이 쌓이고 행복의 순간들도 많이 겪어보았지만 그때만큼 티끌 하나 없는 오롯한 자유를 누렸던 때는 없었다.


학교를 모두 졸업하고 도서관에 갔을 때, 그곳엔 여전히 시험을 위해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들을 마주한 순간 나는 더 이상 시험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자각되면서 몸서리치게 좋았다. 그리고 앞으로 인생에서 시험을 위한 공부는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오로지 나의 호기심을 채우고 '진짜 교양'을 함양하고 정신을 성숙시키는 책만 읽겠다고. 하지만 좋아하는 책을 읽고 관심 있는 분야만 공부한다고 해서 항상 시험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로 머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시험공부 이상의 끈기가 필요할 때도 있고 좀 다른 성격의 파고듦이 필요한 경우도 많았다.


6개월간 달려온 철학사 스터디가 끝이 났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마음속의 짐처럼 언젠가는 철학사 책 한 권 정도는 정독하고 싶다고 벼르던 차에 같은 생각을 가진 책 친구가 있어서 큰마음먹고 감행하게 되었다. 버트런드 러셀의 <서양 철학사>로 호기롭게 시작을 했는데 이건 뭐 검은 것은 글자고 흰 것은 종이라는 말로 밖에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난해했다. 분명 일반인도 이해할 수 있는 교양서라고 했는데 나는 일반인이 아니었나 보다. 한 챕터 한 챕터를 넘길 때마다 무수한 강의를 찾아 듣고 수차례의 인터넷 검색에 의존해야 겨우 한 페이지라도 넘길 수 있는 혹독한 시간들이 계속되었다. 좋아서 시작한 일도 다 좋을 순 없다. 책을 끝낸 후의 단맛을 상상하며 일단 끝까지 읽어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시간은 흐를 테고 책장 넘기기를 멈추지만 않는다면 반드시 끝이 날 테니까.


늘 마시던  커피도 유독 맛있게 느껴졌다. 괜스레 안 사도 되는 감성 소품도 하나 사버렸다. 연락도 잘 못 드렸던 엄마께 전화도 한 통 하고 좋아하는 분식집에서 오랜만에 순대도 사 먹었다. 이 홀가분한 기분을 흩뿌리고 싶었다. 마구마구 즐기고 누리고 싶었다. 힘들어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을 몇 차례나 넘겨가며 기어이 마침표를 찍었기에 이 기쁨을 마음껏 들이켜도 되는 거다. 이 순간은 4월의 벚꽃처럼, 눈부시게 아름답지만 찰나의 시간으로 스쳐 지나가 버려서 더 짜릿하다.


그리고.

소박한 혼자 만의 축제를 즐기고 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분명 바쁘고 정신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할 것이고 쉽지 않을 것이다. 늘 그래 왔으니까. 하지만 스스로 자처한 고난의 끝엔 찰나의 홀가분함이 기다리고 있을 것임을 믿기 때문에 견뎌낼 수 있다. 그땐 세상 가장 향긋한 커피 한 잔 마시며 그 시간을 만끽하리라 기대하면서.






























작가의 이전글 가난한 부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