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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성 Nov 17. 2021

운명적 친구 승희에게

<하늘에는 아직도 별들이 살고 있다>를 찾아들었어. 맑고 경쾌한 멜로디가 나를 순식간에 그 가을  '문학의 밤'을 준비하던 자리로 데려다 놓았다. 꺼내 본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색이 바래고 희미해져 가던 사진들이 다시 색을 얻어 생기가 돌았어. 대학생, 인생에서 참 선물 같은 시간이야. '인생의 방학'이었던 것 같아.  '지금까지 공부하느라 수고 많았어. 이제부턴 즐거운 시간 보내렴. 앞으로의 삶은 조금 더 힘들 거야. 그러니 정말 신나게 놀아둬야 해. 삶이 힘들 때마다 꺼내 보면서 견딜 수 있도록 좋은 추억 많이 만들어.'라는 의미의 방학 말이야

     

지난번에 네가 참 좋더라고 이야기했던 故황현산 선생님의 <밤이 선생이다>에 이런 구절이 있더라.

     

우리에게 과거의 상처는 너무 악착스럽고, 미래에의 걱정은 갈수록 두터워질 뿐이다. 그래서 현재는 그만큼 줄어들고 눈앞의 삶을 깊이 있게 누리는 것이 용서되지 않는다. 과거의 상처가 미래의 걱정거리로 확장되는 것을 막기 위해, 대학은 지금 이 자리의 삶에 자신을 자유롭게 바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마련하려고 오랫동안 노력해왔다. 대학의 목적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 자유의 시간과 공간이 없이는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황현산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김연아가 대학생이 되려면> p42  


우리의 대학 시절은 '대학이 지금 이 자리의 삶에 자신을 자유롭게 바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마련하려고 오랫동안 노력해 온 것들'을 그런대로 잘 누리며 지냈구나 싶어. 미래에 대한 불안이 없을 수는 없으니 성적, 진로, 친구, 연애 등의 문제들을 항상 가지고 있었지만 그 걱정거리들에 우리의 '지금'을 희생시키진 않았던 것 같아. 화려하지 않았지만 그때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 잘 놀았어. 좀 더 치열한 시간을 보냈더라면 하고 생각해 볼 때도 있지만 다시 돌아가도 다르진 않을 거야. 왜곡되고 지워지기도 했겠지만 다시 떠올려보는 우리의 대학 생활은 함께여서 찬란했어. 그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이 있고, 나와 우리의 지금에 만족하고 있어. 4년간의 짧은 방학 동안 부지런히 쌓아둔 추억이 있고 때때로 그 추억을 끄집어내 함께 이야기할 사람도 곁에 있잖아. 서로의 기억을 짜맞추어 보면서 그 시절의 한 장면을 완성하고 함께 웃는 그런 날을 즐기고 있어 우린.    


우리의 인연,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인연들을 내가 노력해서 만들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일리아스>를 읽다 보니 과연 인생의 중요한 문제들을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더라. 운명이라는 것에 대해서. 15장에서 헥토르가 아이아스의 창에 맞아 목숨이 위태로워져. 헤라가 제우스를 유혹해서 잠자리에 든 사이 포세이돈이 아카이오이족의 사기를 높여 승기를 잡은 그때 말이야. 그때 헥토르가 꼼짝없이 죽겠구나 싶었는데 잠에서 깨어난 제우스가 아폴론을 시켜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워. 제우스 마음인 거야. 헥토르는 신의 비호로 살아서 기쁘지만 결국 그의 생명은 아킬레우스의 복수에 좀 더 역할을 하기 위해 되살려진 것에 불과하고 그는 그것을 알지 못한 채 기세 등등하게 다시 전장을 누비지.      


운명이라는 것, 정해져 있을까? 라고 묻는다면 나는 '그렇다'는 쪽이야. 태어나고 죽는 것부터 진로 선택이나 결혼, 출산, 모든 것이 이미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곤 해. 그러면 너무 재미가 없을까? 그런데 말이야 정해져 있다고 해도 그걸 알 수는 없잖아. 정해진 선택이었든 의지의 선택이었든 결국 무수한 선택들을 해야 하고 자신이 선택한 것들을 살아가야 해. 선택의 결과는 좋을 수도 있고 혹은 나쁠 수도 있겠지. 이때 결정론적 운명론이 쓸모가 있어. 나쁜 결과에 대해, 기대에 어긋나는 결과들에 대해 '그렇게 될 일이었다, 이미 그렇게 되도록 정해진 일이었다.' 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좀 편안해지더라. 선택에 대한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게 돼. 좋은 결과에 대해 오만해지거나 나쁜 결과에 대해 필요 이상의 절망에 빠지지 않고 담담히 받아들이는 거지. 정해진 인생을 수동적으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거라면 우리가 애쓰고 살아가는 삶이 너무 허무해져버려. 그런 의미에서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내게 어떤 인생이 주어졌다 하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이고 사랑하겠다는 의미였어.    


요즘 제우스께선 나를 좀 흔들고 계시는가 봐. 본업이 잘 안 풀리고 있어. 정든 학생들과 자꾸 이별하는 일이 생겨. 우리 일이라는 게 냉정하잖아. 어찌 되었든 학생들이 성적을 잘 받을 수 있도록 공부시켜야 하고 또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이 돌아오니까. 아쉬울 때도 있고 좀 억울할 때도 있지만 변명하고 싶진 않아. 다만 매일 만나던 아이와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작별하게 되었을 땐 어쩔 수 없는 공허함이 있어. 그동안 그 녀석과 내가 함께 보낸 시간은 무엇이었나 하는. 하지만 오래가진 않더라. 익숙해졌으니까. 아이들이 학원을 그만두는 일이 자주 생기면 심정적인 충격도 충격이지만 경제적인 타격도 무시할 순 없잖아. 생계가 달린 일이니 경제적인 문제들로부터 마냥 자유로울 수만은 없지. 그런데 요즘 위기인 것은 분명한데 위기라는 생각보다는 '전환점'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게 참 신기해. 이런저런 걱정과 불안으로 좀 괴로워야 하는데 그렇진 않아. 다행이지? 이것이 <일리아스>가 나에게 남긴 거구나 싶어. 제우스가 나를 어딘가로 데려가려고 하는구나 생각하게 되거든.      


어디로 데려가려는 것일까 생각이 들 때, 갈 곳이 없다면 슬프겠지. 하지만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달라져.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혹은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면 위기를 신호라고 받아들이게 돼. '의지'가 개입하는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어딘지 모를 곳으로 실려 가는 게 아니라 이참에 가고 싶어서 점찍어둔 곳으로 가보기로 한다면 말이야. 반드시 더 좋은 곳으로 데려갈 거라고 낙관하진 않아. 더 나빠질 수도 있고 더 좋아질 수도 있는데 어차피 그건 알 수 없으니. 다만 이 기회에 내가 하고 싶었던 걸 시도해보는 것만 내가 할 수 있을 뿐이야. 내 운명이 어떻게 정해져 있는지 모르겠지만 알 수는 없으니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만 남아 있다고 생각해. 지금 당장 어딘가로 가겠다거나, 무엇이든 시작 해보겠다는 게 아니야. 글쓰기를 하고 있고, 이 글쓰기로 어떤 결실을 맺고 싶다는 목표가 있으니 지금의 위기를 기회라고 생각할 여유를 가질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참 신기해. 뭔가 꿈을 꾸는 삶이라는 게 말이야. 내 꿈은 10대 때부터 글을 쓰는 사람이었고, 글을 한 글자도 쓰지 않고 있던 시기조차도 그 꿈을 한 순간도 잊어본 적이 없었거든. 부끄러워 말은 못 했지만 항상 마음속에 뜨겁게 품고 있었어. 몇 번의 시도들과 몇 번의 좌절들이 있었고 나이가 들어가니까 '아, 꿈은 그냥 꿈일 뿐일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도 들더라. 그런데 꿈이 그냥 꿈으로 끝이 나더라도 꿈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은 행복해. 그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 가슴속에 하고 싶은 무언가를 심어 두고 있는 사람은 그리고 그 꿈을 위해 작은 뭔가라도 하고 있는 사람은 행복하지 않을 수 없어. 꿈이라는 게 자기가 좋아하는 무언가일 텐데 좋아하는 거 하면서 안 행복할 수는 없잖아. 나 역시 그동안 오래 묵혀둔 꿈 덕에 행복했어. 삶이 괴로울 때에는 단지 떠올리는 것 만으로 위안을 받기도 했고. 마치 '꿈'이 내 안에서 발효를 해서 현실에서의 성취와는 다른 형태로 나를 성공시키는구나 싶어.      


하지만 꿈으로부터 얻는 위안이 좋고 행복이 좋아도 그것으로만 만족할 수는 없지.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해>라는 책의 존재는 정말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네.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과 너무나 닮은 책이어서 당황스럽지만 한편으로는 우리가 선택한 길이 틀리지 않았다는 신호인 것 같기도 해서 나쁘지만은 않아. 좋은 글들 많이 써서 이쁜 제목 붙여서 우리 책도 꼭 세상에 내놓자. 제우스가 어떤 방해를 해도 이번만큼은 우리 명(命)을 우리가 운(運)해보자.


뜬금없는 마무리지만 오늘은 뜬금없이 이만 총총할게.


2021.11.17 <일리아스>를 내 마음대로 읽은 은성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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