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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성 Nov 29. 2021

매번 어려운 숙제로 나를 괴롭히는 승희에게

현아가 곧 성인이 된다니 시간 참 부지런하다. 현아 열 살 되던 해. 네가 정말 사랑한 두 가지, 조카와 여행을 묶어서 추억을 만들었던 게 생각난다. 이모와 조카 둘만의 일본 여행. 사랑을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었던 멋진 퍼포먼스였지. 그 귀염둥이 꼬마가 벌써 그만큼 커서 수능을 봤다니. 현아가 재수를 하기로 결정해서 가족이 모두 좀 심란하겠지만 우리 역시 그런 나이가 있었고 그때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잘 모르는 게 정상이잖아. 현재 현아의 혼란이 제 길을 잘 가고 있다는 반증으로 보인다 나는. 자신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는 청춘이 오히려 더 걱정이지. 현아를 아무리 사랑해도 그 녀석의 행복까지 찾아줄 수 없다는 게 우리를 안타깝게 하지만 결국 자기를 마주하고 진정한 자신을 찾아갈 테니까 그 대견한 모습을 그저 지켜봐 주는 게 우리의 몫인 것 같아. 나는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에 현아가 나이만 먹은 게 아니라 정말 어른이 되고 있구나, 그것도 멋진 어른이 되겠구나 싶어서 참 좋은데. 재수를 결정하고 다음 입시를 치르는 1년이 현아의 '잃어버린 시간'이 되진 않을까 염려는 되겠지만 그 시간의 의미를 꼭 '찾게' 될 테니 믿고 응원해주자. 아마 머지않은 시기에 혜령이가 진로를 고민하고 있을 때 그 터널을 조금 먼저 지난 현아가 우리보다 더 능숙한 조언자 역할을 해주고 있을 테니까.     


현아에게 도움이 될 만한 책이 뭐가 있을까. 내 빈약한 책장을 한번 쭉 둘러보는데 이거다 싶은 책이 안 보이네. 그냥 재밌는 책을 읽었으면 좋겠어. 그동안 수험생으로 숨 막히는 1년을 보냈잖아. 겨울 동안은 그냥 재미만 쫓아도 될 것 같아. 몸도 정신도 지쳤을 테니 회복의 시간을 가져야지. 지금 이 타이밍에 우리 욕심으로 <데미안>, <달과 6펜스>, <수레바퀴 아래서>를 들이민다면 틀림없이 다음부턴 책을 추천받으려 하지 않을 거야. 재미없고 고리타분한 사람으로 낙인찍히는 건 싫으네. 이제 스무 살 될 아이에게 뭔가를 추천한다는 게 어렵다. 정유정 작가의 책들이 재미있게 읽기에 좋지 않을까.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 요거 괜찮겠다. 살짝 오래된 책이라 내용은 가물가물한데 읽고 났을 때 좋았다는 기억은 또렷해. 재미있었어. 메시지도 좋아서 읽었던 당시에 많이 추천했었고 조카에게도 선물했었어. 제목도 지금의 현아에게 어울리네. 겨울날 따뜻한 방 안에서 고구마 까먹으면서 읽기에 안성맞춤이야. 그리고 한비야, 손미나의 책들이 떠오른다. 두 사람 모두 '열정'하면 떠오르는 인물들이잖아. 쉽게 잘 읽힐 것 같아. 한비야의 <1g의 용기>, <그건 사랑이었네>, 손미나의 <스페인, 너는 자유다>를 권하고 싶어. 예상했던 궤도를 벗어나면 뭔가 잘못될 것만 같아 불안하잖아. 한비야와 손미나의 책은 '벗어나도 괜찮다, 용기 내도 된다.'라고 말하니까 힘을 얻을 수 있을 거야. 다른 길을 선택할 수도 있고, 그 길에서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에 매혹되어 또 다른 행복을 발견하기도 하잖아. 그런 인생의 예측 불가능성을 받아들이고, 과감하게 저질러도 큰일 안 난다, 그래도 괜찮더라는 감각을 가지게 되길 바라. 부디 도움이 되길.     


현아 이야기를 한참 하다 보니 현아와 내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어딘가로 가고자 한다는 점에서 말이야. 좀 다르다면 나의 경우는 어디로 가고 싶은지에 대한 결정은 내렸다는 정도. 영화 <범죄도시>에서 장첸을 연기했던 윤계상이 <유퀴즈>에 나온 걸 봤어. 얼굴이 클로즈업돼서 잡히는데 주름도 생겼고 세월의 흔적들이 얼굴에 멋지게 스며있더라. 인터뷰 중에 그런 대답이 있었어. 자신은 인생에서 연기가 제일 중요하다고. 어떻게 하면 자기가 맡은 배역을 잘 소화해내서 자연스럽게 전달할 수 있을까에 대해 늘 고민하고 있다고. 그게 너무 재미있어서 다른 것에서는 재미를 찾을 수가 없대. 진심으로 느껴졌어. 더 잘하고 싶어 미치겠는 일을 하고 있고 한발 더 나아가기 위한 고뇌로 인생을 채워가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어. 살아가면서 무수한 걱정들, 고민들 많이 하잖아. 그 걱정과 고민의 자리에 '좋아하는 일을 어떻게 더 잘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뇌가 꽉 들어차 있다니 그보다 재밌는 인생이 있을까. 그의 고뇌가 얼굴에 그대로 내려앉아 있는 듯했고 그 고뇌의 증명으로 얼굴에 깊게 팬 주름이 아름다워서 부러웠어. 좀 반성을 했다.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얼마나 하고 있나 자문 하면서 좀 부끄러웠어. 고민은 그냥 가만 앉아서 명상하듯이 생각만 하는 것을 의미하진 않잖아. 예를 들어 글쓰기에 대한 조언이 담긴 책이나 강의를 찾아본다던가, 너처럼 매일 문장 만들기 같은 구체적인 방법을 마련한다던가 하는 실천이 뒤따라야 하는 거지. 그런 고민들을 인생의 즐거움으로 삼는 삶을 살아 보겠다는 마음이 생겼어. 시간이 지나 내 즐거운 고뇌의 발자국이 남긴 흔적들이 깊고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면 내 인생 최고의 찬사가 될 것 같아.     

 

그러고 보니 우리가 지금 함께 읽고 있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즐거운 고뇌'라는 표현과 딱 어울리지 않아? 여러모로 만만한 책은 아니지만 우리 분명 즐거워하고 있잖아. 우리 삶의 모든 것들에 낙관을 찍어둔 프루스트식의 표현들에 환호하고 열광하고 있어. 진입장벽이 높다는 인식 때문에 도입 부분에서 조금 헤맬 때는 이 책을 시작한 것이 과연 잘한 일일까 하는 성급한 후회가 밀려오려고 했는데 그 유명한 홍차와 마들렌이 등장하는 순간 숨이 딱 멎었어. 너무 좋아서. 당장 홍차를 샀고 홍차를 담아 마실 이쁜 찻잔도 새로 마련했어. 내 삶에 홍차를 즐기는 기쁨이 추가되었어.     


침울했던 하루와 서글픈 내일에 대한 전망으로 마음이 울적해진 나는 마들렌 조각이 녹아든 홍차 한 숟가락을 기계적으로 입술로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조각이 섞인 홍차 한 모금이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내 몸속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감미로운 기쁨이 나를 사로잡으며 고립시켰다. 이 기쁨은 마치 사랑이 그러하듯 귀중한 본질로 나를 채우면서 삶의 변전에 무관심하게 만들었고, 삶의 재난을 무해한 것으로, 그 짧음을 착각으로 여기게 했다. 아니 본질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이 초라하고 우연적이고 죽어야만 하는 존재라고 느끼지 않게 되었다. 도대체 이 강렬한 기쁨은 어디서 온 것일까?  (p86 민음사)   


‘마들렌 조각이 녹아든 홍차 한 숟가락’이 소환한 콩브레에서의 기억들. 유년 시절 콩브레에서 축적된 짧고 강렬한 경험들이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그의 삶을 단단히 지탱해주고 있었고 그걸 다 잊고 살다가 순식간에 휘리릭 하고 떠올라버린 거지. 누구나 이런 경험들 있잖아. 보통은 음식보다는 음악에서 그런 감정을 느낄 때가 있다는 말들을 많이 하고. 나에게 홍차와 마들렌은 흰 쌀밥에 깻잎 한 장이었어. 김 모락모락 나는 흰쌀밥에 짭조름한 깻잎 한 장을 얹어 먹을 때 항상 엄마의 사랑이라는 이미지와 연결이 되곤 했었거든. 그런데 그게 단지 엄마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유년의 따뜻했던, 내 속을 단단하게 채우는 유년의 모든 것이 응축되어서 내게 전달되었던 거였어. 너에게도 그런 음식이 있을까?     


다음에 만날 땐 꼭 함께 홍차를 즐기자. 홍차에 마들렌을 적셔 먹으면서 편지로는 다 말할 수 없는 이 책의 매력들을 실컷 떠들어 보자. 오늘은 이만 총총할게.          


2021.11.29. 매번 또 그 어려운 숙제를 해내는 은성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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