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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성 Jun 25. 2022

친구가 있으니 혼자 살아도 좋지 아니한가

금요일 오후. 일주일 동안 잠잠하던 '미녀 삼총사' 단톡방 알림음이 울린다.

"우리 내일은 어디로 갈까?" 삼총사의 행동대장인 ''이다.

"황산공원까지 걸어가서 공원을 한 바퀴 돌고 와도 좋고, 더 멀리까지 가도 괜찮고." 내가 대답한다. 정말 황산 공원을 가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매번 귀찮은 결정을 에게 맡기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에 거드는 시늉이나마 해보는 말이다. 썬의 대답이 없다. 아마 여기저기를 찾아보고 있겠지. 그동안 '한 번 가봐야지.' 생각만 하고 미루었던 장소들을 떠올려 보거나 주변에서 추천받아 둔 장소들을 검색해보고 있을 거다. 그 사이 '현명한 아이'가 대답한다. "아무 데나 좋아." 잠시 후 썬의 결정이 내려졌다. 내일은 지하철을 타고 구명역에 내려서 '구포 무장애 숲'을 걸어보자고 한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곳이지만 현명한 아이와 나는 썬의 결정을 무한히 신뢰하고 있기에 단 한마디의 군소리도 없이 "좋아."라고 한다. "내일 아침 6시, 지하철역에서 봐."를 남기고 세 사람 모두 퇴장한다.      


첫 시작은 지난 3월이었다. 현명한 아이의 생일이 다가와서 오랜만에 얼굴이나 한번 보자 했고 시간을 정하다가 세 사람 모두가 자유로운 시간,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길 확률이 가장 낮은 시간을 고르다 보니 아침 6시였다. 그날은 비가 내렸다. 비가 올 거라는 걸 알았지만 세 사람 중 누구도 약속에 대한 의문은 갖지 않았다. 이른 봄이라 아직은 공기가 찼고 비까지 내려서 산책길을 걸어도, 공원을 지나도 마주치는 사람이 없었다. 사방이 텅 비어 있으니 세상이 더 넓어졌고 그넓은 세상이 온통 우리 차지가 되었다. 일요일 아침 6시의 바깥공기는 낯설었다. 세 친구의 만남이 오랜만이기도 했지만 그 시간, 그 장소에서의 만남도 셋에게 처음이었던지라 여행을 하는 것처럼 설레고 신났다. 비가 우산 속으로 들이쳐 옷이 다 젖어도 신경 쓰지 않았고 운동화에 빗물이 스며 질퍽거려도 아무렇지 않았다. 쉴 새 없이 이야기하며 비와 함께 걸었고 1시간 30분쯤 걸었더니 호포 에 도착했다. 그리고 불이 켜진 국숫집을 발견했다. 만장일치로 들어가서 따뜻한 국수를 한 그릇씩 하고 기찻길이 내려다 보이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비에 젖은 몸을 말렸다. 모든 게 좋았다. 비가 오는 날씨도, 다리가 묵직해질 정도로 걸었던 길도, 계획에 없었던 국수도, 카페의 첫 손님이 되어 마신 커피도. 세 사람 모두 이날의 아침 만남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매주 토요일 아침 6시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셋은 고등학교 때부터 친했던 친구들이다. 현명한 아이는 공부 잘하는 아이로 유명했고 썬은 수학 선생님을 유난하게 좋아하는 아이로 유명했다. 그리고 나는 굳이 분야를 말한다면 수업 시간에 많이 자는 아이로 유명했다. 각자의 분야에서 유명하기를 충실히 하면서 셋은 무던하고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도시락을 함께 먹었는데 교실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밥을 먹는 팀이었고 밥을 다 먹고 양치질을 하고 나면 점심시간이 다 가버리는 느림보들이었다. 스무살이 된 세 느림보는 뿔뿔이 흩어져서 대학을 다녔는데 졸업을 하고 약속이나 한 듯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한창 열심히 만났던 우정 성수기도 있었고 각자 삶이 바빠서 오래도록 만나지 못하는 우정 비수기도 있었다. 세 사람의 인생 곡선의 율동 주기가 달라서 셋 다 멀어지기도 하고 둘씩 가까워지기도 하고를 왔다 갔다 하다가 지금은 셋의 주기가 딱 맞아떨어지는 때를 만났다. 속설에 여자 셋은 잘 지내기가 어렵다고들 하는데 대체로 그렇다고 해서 항상 그런 건 아니라는 걸 삶으로 증명하고 있는 미녀 삼총사다.    

  

오랜 우정의 비결이라고 하면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친분에 비해 연락이 뜸하고 자주 만나지도 않는다는 게 아닐까 한다. 서로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지만 다 알려고 하지는 않는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두 번째 비결은 식성이다. 별것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관계의 원활한 유지에 식성이 기여하는 바는 생각보다 크다. 우리가 맺는 공적, 사적 인간관계에서 함께 밥 한 끼도 먹지 않는 사이로 오래 지내는 경우는 잘 없다. 결국은 함께 식사를 하면서 일을 하고 유대를 다진다. 그런데 식성이 맞지 않는 사람과 자주 식사를 해야 한다면 결국은 마음 상하는 일이 생기고 말 가능성이 높다. 한쪽에서 다른 한쪽을 완전히 배려해주는 것에는 한계가 있고 한 번씩 양보하는 핑퐁도 관계의 초반에는 효과가 있지만 오래되면 불만이 생길 수 있다. 먹는 것 가지고 싸우는 게 좀스러워 보일까 봐 불편한 마음을 내색하기가 쉽지 않은데 사실 그거야말로 양보할 수 없는 중요한 싸움이다. 먹고, 사는 문제는 말할 필요 없이 중요한 일 아닌가. 관계에서 식성이 잘 맞으면 아주 중요한 부분에서 이미 큰 에너지를 아끼고 시작한다. 그러니 다른 문제들이 생기더라도 여유 있는 해결이 가능할 확률이 높다. 아니, 구구절절 복잡하게 설명할 것 없이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만족감을 느낄 때의 하나 되는 기분은 소중하다. 갑자기 연락해서 다짜고짜 "떡볶이 먹으러 갈래? "를 물어볼 수 있다는 게 관계를 20년 넘게 이어올 수 있게 한 힘이었다.     


5월 마지막 토요일. 아침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셋이 함께 다녔던 고등학교를 잠시 들렀다. 우리 셋은 졸업을 하고서도 종종 주말이나 명절에 만나면 학교에 는 걸 좋아했다. 자판기 커피도 뽑아 마시고 교정도 거닐면서 고등학교 때 선생님들 얘기, 친구들 얘기하는 걸 즐겼다. 오랜 세월 동안 학교도 참 많이 변했는데 몇몇 추억의 장소들은 그대로인 곳들도 있어서 셋은 옛날이야기를 어제 일들인 것처럼 실컷 떠들다 돌아왔다. 나고 자란 곳에서 살고 있어 가능한 행복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병에 걸려 잠깐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서 깨달았다. 서른 즈음에 일본에 잠깐 머무르면서 다시 한번 확인했다. 나는 내 고향 양산을 무척 사랑하고 있고 이곳에서 살 때 가장 자유롭다는 걸. 멀리 떠났다가도 결국엔 다시 돌아오게 되었던 건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것들 가까이에서 살아갈 수 있어 참 좋다. 지나온 시간들이 과거로 버려지지 않고 현재의 나와 함께 존재하게 할 수 있어 허무하지 않다.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으니 혼자 있어도 흔들리지 않는다. 게다가 같은 시간을 공유한 친구들이 곁에 있으니 가난해도 부자다.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친구들이 없었다면 나의 독립생활은 분명 조금 덜 행복했을 것이다. 언제나 만날 수 있는 친구들이 가까이 있기 때문에 혼자 있는 시간이 더 빛날 수 있다. 외로움이나 공허함으로 얼룩지지 않는다.  

    

열일곱에 만난 친구들과 마흔다섯의 나이를 함께 걸어갈 수 있다는 건 아주 특별한 행운이다. 썬은 두 남매를 키우는 엄마이자 유능한 커리어우먼이고, 현명한 아이는 포켓몬 빵 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는 열두 살 남자아이의 엄마이자 역시나 멋진 커리어우먼이다. 그리고 나는 작은 교습소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멋지게 혼자 살고 있다. 삶의 모습이 다 다른 세 사람의 우정을 가장 튼튼하게 받치고 있는 게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태도가 아닐까.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자신의 고난을 대신 짊어져 주진 못한다. 그저 곁에 함께 있어줄 뿐이다. 삶에서 맞닥뜨린 고난을 스스로 잘 견뎠고 각자가 자신의 삶을 잘 가꾸어 왔기 때문에 지금의 우정 성수기를 함께 즐길 수 있다. 아무것도 해놓은 것 없이 헛헛해 보이는 삶이 내 옆에 있는 친구들로 인해 썩 괜찮아진다.      

나 잘 살았구나, 성공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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