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전하는 느슨한 시간

챕터 7. 로즈(Rose)

by 송수지

요 몇 주 간은 이어진 강의 일정과 여러 일들로 정신이 없었어요. 조금은 여유 없는 마음으로 주어진 일만 생각하면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한 강의에서 마끈과 텍을 가져가서 날짜나 쓰고 싶은 내용 써 가실 수 있게 했는데, 지나가는 저를 어르신 한 분이 붙잡으셨어요.

“선생님, 제가 쓴 것 보세요. 저에게 바칩니다. 소중한 저에게 선물하는 거예요.”

너무 멋지지 않나요? 가슴에 손을 얹고 진심을 담은 말을 저에게 전해 주셨습니다.


며칠이 지난 지금도 계속 생각이 나네요. 방금은 귀여운 딸의 손을 잡고 함께 들어오신 손님이 한 달간 수고한 나에게 그리고 딸에게, 아들에게 선물하는 꽃을 사가셨어요. 좋아하는 장미를 딸과 함께 고르고, 아들이 좋아하는 국화 종류를 고르고, 저에게 추천받은 꽃도 더해보고, 아이가 유칼립투스 향기를 맡아보면 좋을 것 같아서 이건 저의 선물로 더해 보았어요. 포장지는 아이와 함께 골라서 민트색으로 어여쁘게 마무리해 보았습니다. 포장하는 동안 딸에게 전해 주시는 말들이 곱고도 따뜻해서 도란도란 얘기도 잠깐 나누어 보았어요. 나가신 후 공기도 조금 더 푸근해진 것 같습니다.


생각지 못한 순간에 더해진 따뜻함에 오늘 좀, 제 맘도 따뜻해지는 기분입니다. 해야 할 일들 잘하고 싶은 책임감에 우선순위를 일으로만 정하고 정리만 해가며 몇 주를 지낸 것 같아요. 어쩌면 더 오랜 시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출강을 다니면서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들에 달력을 보는 시간도 많아지고 거듭해서 챙길 것들을 체크하고 일들을 곱씹는 것이 이제는 습관이 된 것 같아요. 잠깐씩 쉬는 거 좋아하는 제가 이제야 떠오릅니다.


저도 저에게 선물하고 싶어서 좋아하는 차 마시면서 몸도 데우고 노래 들으면서 쉬어도 보았습니다. 지금은 한 달간 수고한 나에게 뭘 선물해 볼까 골똘히 궁리하는 중입니다. 정성스레 생각해보려 합니다. 저를 위해서요. 무언가를 사주고도 싶고 달콤한 디저트도 좋겠고, 걷는 것 좋아하니 그것도 좋겠고 생각만 하고 있는데 자꾸 미소가 떠오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 순서대로 떠올리고만 있는데 기분이 이렇게 좋아지네요.


무엇을 할까 며칠을 생각해 보았어요. 기분 좋은 고민이었습니다. 번뜩 사고 싶었던 책을 사보아야겠다 생각이 드네요. 오랜만에 좋아하는 류시화 작가님 책을 사서 한적한 기분으로 읽어 보아야겠습니다. 다음 주까지는 바쁘겠지만 그래도 이 바쁨이 감사함을 알고 있습니다. 체력이 너무 바닥난다면 지금처럼 좋아하는 노래와 주변을 좀 걷고, 오렌지 과육의 상큼함과 루이보스의 부드러움을 우려 마시며 쉬어가면 될 것 같습니다. 책을 읽다 보면 나의 생각을 정리해 주는 듯, 내 마음과 딱 맞는 구절을 만나면 참 반갑습니다. 이번 주가 그러한 주였어요. 딱 맞는 시간에 저에게 여유를 나눠 주시는 분들을 만나서 저는 아주 잘 쉬어갔습니다.


라비앙 로즈 영화를 보면서 처음 에디트 피아프라는 가수를 알게 되었어요. 영화를 보다 보면 어둡고 짙은 버건디 색이 떠오릅니다. 흘러나오는 노래들이 너무나도 감미로워서 몇 번을 보았던 영화입니다. 찾아보니 벌써 20여 년의 세월이 되어가네요. 이렇게 긴 시간이 흐른 줄은 몰랐어요. 그 세월 동안 저는 이 노래들을 즐겨 들었네요. 지금 흘러나오는 라비앙 로즈 노래가 마시는 차와 아침 온도와 어우러져 참 평화롭고 나른한 기분이 느껴집니다. 처음 들었던 프랑스어 대사들이 낯설기도 했는데 오래 들어서 이제는 익숙해진 가사들에 편안함이 느껴집니다.


로즈 향기는 오랜 세월 사랑을 받아서인지 때로 너무 무난하고 흔하다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떤 날이든, 어떤 순간이든 또 어떤 옷을 입어도 향이 잘 어우러져 좋은 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릴 적 목욕탕에서 사용하던 비누에서 맡아본 듯도 하고 바디 워시나 로션에서도 났던 듯도 합니다. 밖이 점점 흐려지고 비가 올 것 같은데 오늘 사용하면 기분이 상쾌해질 것 같네요. 당분간 지금 마시는 차에서 느껴지는 오렌지에 로즈와 진저향기를 블랜딩 해서 오래전 사용하던 향기를 느껴볼까 합니다. 만들어 볼 생각을 하니 창 밖 풍경도 조금 다르게 느껴지네요, 곧 비가 내리면 2층으로 올라가서 빗소리를 실컷 들으며 만들어 봐야겠어요.



저는 써 놓았던 글들을 다듬어서 다시 돌아보며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번 챕터는 작년 말쯤 적어 두었던 챕터예요. 글을 읽으니 요맘때쯤 뿌리고 다니던, 비 오는 날 만든 로즈향수가 코끝을 맴도는 것만 같습니다. 글을 올리는 오늘은 화사한 봄날에 햇빛이 눈부신 날이에요. 오늘 바람은 좀 차서 따뜻한 카모마일 차를 마시며 공방 환기를 시켜주고 있습니다. 이제는 저의 일상으로 자리 잡은 휴식들이라 잊고 있었는데 글을 읽으며, 아 이렇게 시작하게 되었지 싶습니다. 일상 속 주어지는 작은 느슨한 순간들에 감사함을 전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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