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8. 모스(Moss)
오늘 아침 공방으로 오는데 날씨가 제법 쌀쌀해서 고등학교 시절 등굣길 새벽 공기가 생각났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대를 꼽으라면 새벽 6시 반 상쾌한 공기가 창문을 통해 들어올 때입니다. 이사를 한 후 달라진 환경에 그 시간에 깨고는 했는데 얼마간 몸은 피곤했지만, 그 시간의 공기가 좋아서 1년 넘게 기상 시간을 유지하기도 하였어요. 아는 동생은 10시 반에 잠들고 그 시간에 깨니 할머니 같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공감, 건강해서 활력이 느껴지는 할머니 생활을 한동안 했었습니다.
어느 계절이든 그게 여름이더라도, 낮시간 활동하는 온도보다 한 계단 정도 낮게 느껴지는 바람이 얼굴에 닿는 느낌을 좋아합니다. 같은 시간에 눈을 떠서 이불을 정돈하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킵니다. 눈도 못 뜬 채로 느껴지는 바람이 시원해서 기분이 좋아집니다. 잠깐 기지개를 켜고는 10분 정도 좋아하는 선생님의 영상을 틀고 명상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날마다 집중도는 다르지만 몸을 잠깐씩 풀고 공기를 깊고 천천히 마시고 뱉는 시간이 하루 시작을 개운하게 만들어줍니다.
아침 공기에 고등학교 시절이 떠오른 것은 아마 아침 자율학습 시간 덕인 것 같습니다. 0교시라고 불렸던 아침 같기도 한 새벽, 일찍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별을 보고 등교해 야간 자율학습인 야자까지 마치면 다시 별을 보고 집에 온다는 말을 하기도 하였죠. 그때 우리의 즐거움 중 하나는 0교시 끝나고 뛰어 내려가 컵라면 하나 먹고 믹스 커피를 마시며 유유히 올라오는 것이었어요. 때때로 김밥도 먹고요. 쉬는 시간에 먹는 컵라면은 얼마나 맛있었던지요. 근데 10분 만에 어떻게 다 한 거죠?
지금도 그렇지만 아침밥은 꼭 먹어야 해서 아침 먹고도 안 먹은 애처럼 그렇게 또 먹었지요. 라면하니 야자시간에 몰래 먹는 라면도 빼놓을 수 없어요. 그땐 왜 그렇게도 배가 고팠는지, 몰래 심장을 두근두근하며 내려가서 먹고 오다 한 날은 드디어 들키고 말았어요. 밑이 훤히 뚫린 파티션 뒤에 숨었다가 걸려서 선생님이 웃음을 참으며 혼내시기도 하고,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냄새에 돌아다니시던 선생님들이 어찌 모르셨을까요. 그냥 눈 감아 주셨던 날들이 많으셨을 것 같네요. 계단 올라오시며 아 누가 라면을 또 시켰구나 하셨겠죠? 그래 이런 재미도 있어야 하지 하시지 않으셨을까요.
하루는 뒤에 앉은 친구가 야자 시간에 콕콕 찌르며 자꾸 장난을 쳐서 안 그래도 공부하기 싫은 저는 몹시 재미있었죠. 그날 감독 선생님은 저희 담임 선생님 이셨는데 감독 시간 내내 걸리고 혼내도 혼내도 웃고 있으니 운동장으로 나가라 하시더군요. 둘이 킥킥하며 따라나가니 운동장 한가운데서 달을 보고 있으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또 멍하니 둘이서 뒷짐 지고 보고 있었습니다. 저희는 창가에 앉은 전교생의 시선을 받으며 운동장 한가운데 그렇게 한동안 서 있었어요. 쉬는 시간까지 있어야 해서 구경 나온 후배들도 있었죠.
선생님 저 기억력 좋은 편은 아닌데 이건 평생 기억할 듯해요. 너무 낭만 있는 훈육 아닐까요? 저도 강의를 다니니 그런 조용한 장난꾸러기들이 있죠. 혼도 내다 화도 내보셨다가 진심 화나실 법도 하셨는데(저 좀 그럴 거 같아서요. 제가 아직 한수 아래네요. 선생님!) 저렇게 벌주고 선생님도 웃기셨죠? 그렇게 구경해도 뻔뻔하게 서있어서 좀 기가차지 않으셨을까 생각도 드네요. 아직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후배에게도 낭만 넘치는 훈육을 여전히 하시고 계실까요?
공부하는 시간이 너무 길어서 그 당시는 참 힘들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늘 그렇듯 지나고 나니 재밌는 추억입니다. 이제는 사서 하는 공부이니 공부도 사실할 만한 것이고요. 새벽 향기 향수가 몇 년 전 꽤 유행했었는데 그때도 지금도 새벽 하면 잠이 항상 모자라던 시절 반쯤 자는 것 같이 내려가던 등굣길이 생각납니다. 올려다보면 코끝을 스치던 시원한 바람도 떠오릅니다.
향을 생각하면 모스가 가장 비슷할 듯해요. 축축하고 흙냄새가 나는 듯도 하고 꿉꿉한 듯 하지만 시원한 그 향기가 새벽과 꼭 닮아 있습니다. 실제로도 많이 사용해서 저만의 느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모두 느끼는 그 새벽의 느낌과 닮아 있네요.
모스 향기를 강의에 가져가면 호불호가 강해서 꽤 놀라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모스의 특징들을 알려줘요. 향수에 들어가 내가 고른 향기를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모스입니다. 좋지 않은 향기같이 느껴지는 향료도 어떤 향과 섞이냐에 따라서 다른 색을 내고 자신의 역할을 하는 점이 저는 참 좋습니다. 제가 향을 만드는 작업들에 빠져든 큰 이유이기도 합니다.
각기 다른 색을 가지고 만나서 하나로 섞이며 좋은 향을 낼 때, 실수로 들어간 향기가 오히려 좋을 때, 그런 우연의 순간까지 좋아지게 하는 작업들입니다. 공방 옆에 붙어있는 작은 화단이 있는데 풀이 많아서 비슷한 향이 날 때가 있어요. 무심코 바라보니 얼마 전 정리를 해준 덕분인지 이름 모를 꽃들이 불쑥 자라 있네요. 봉우리 하나는 노란 예쁜 꽃을 피워서 참 곱습니다. 흙과 풀잎의 향, 노랗고 조그마한 꽃을 구경하러 나가보아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