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의 '북촌방향'
처음에 나오는 무비 인트로가 마음에 들었다. 간단 명료하고 자투리가 없고 옛날 한글 글씨체로 쓴 것이 독특했으며 아날로그적이었다. 흑백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스토리에 더욱 몰입할 수 있게 해 주었고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영화적 감성을 표현하기에 더없이 좋은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는 언제나 소박하고 찌질한 남자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찌질한 주인공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때로는 이기적이고, 때고는 위선적인 감추고 싶은 진짜 우리의 모습들...그래서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묘한 공감대를 형성하게 한다.
카메라는 사람의 눈높이 와 같은 위치에서 인물들을 팔로우 한다. 그리고 인물들로의 클로즈업도 약간은 투박하게 들어간다. 이러한 눈높이와 시선의 이동들이 영화를 더욱 현실적으로 느끼게 해 준다.
<북촌방향>의 이야기는 대충 이렇다. 영화감독이자 지방대학의 교수인 성준(유준상)은 서울에 올라와 북촌에 살고 있는 선배 영호(김상중) 만나려다 우연찮은 만남을 연이어 가지게 된다. 거리에서 알고 지내던 여배우(박수민). 인사동에 있는 고갈비집에서 영화학도 세 명과 합석을 하게 된다. 그리고 술에 취한 채 옛 연인 경진(김보경)의 집을 찾아가기도 하며, 영호 선배의 소개로 후배보람을 만난다.
또 영화의 주무대인 ‘소설’이라는 술집에서 옛 애인 경진을 꼭 닮은 술집 사장 예전(김보경)을 알게 된다.
또 시간이 지나 성준은 영호, 영화배우 출신으로 베트남에서 사업을 하다 망한 중원(김의성)과 술자리를 갖게 되고, 보람이 합세하고, ‘소설’에서 또다시 예전을 만나 거리에서 키스를 하게 된다.
또 시간이 지난 후 다시 ‘소설’에 모인 사람들. 영호는 예전과 밤을 지낸 후 눈이 내리는 아침을 맞게 된다. 영화 속 보람(송선미)의 말대로 주인공 성준은 묘한 우연한 상황을 지속적으로 마주하게 되며 이러한 우연 속에서 많은 사람들과 만나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어쩌면 기이한 시간의 덫에 갇힌 듯 보이기도 하고, 데자뷰 현상을 겪는 듯 보이기도 하며, 환상에 사로잡힌 듯 보이기도 한다.
주인공의 궤적은 옛 연인 경진을 만나기 위해 잠시 고덕동(아마도)에 들린 것 외에 영화 내내 북촌의 뒷골목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는 뒷골목이 많이 등장한다. 영화 속에서 아름답게 그려진 것도, 낭만적으로 묘사된 것도 아닌데, 영화 속에 그려진 그 골목길이 친근하고 정겹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 골목에 위치한 허름한 술집에서 인물들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영화 북촌방향의 주무대로 등장하는 주점 ‘소설’도 실제 ‘소설’이라는 상호로 북촌로에서 운영 중인 카페이다. 카페 '소설'은 재동초등학교를 지나 명인미술관 뒷골목으로 접어들면 한옥 락고재 못 미쳐 자리했다. '소설'이라는 손바닥만 한 간판조차 없었다면 막다른 길에 들어선 영화 속 공간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1988년 서울 이화여대 앞에 처음 문을 연 카페 ‘소설’은 신촌, 인사동, 경기 일산, 제주도를 거쳐 지금의 가회동까지, 열한 번에 걸쳐 가게를 옮겼다고 한다. 개업 당시 소설의 손님이 된 20대 청춘들은 어느덧 세월을 품은 주름이 자연스러운 중년이 되었다.
이곳엔 메뉴판이 따로 없다. 안주는 단골들이 직접 이름 붙여준 ‘젖은 안주’와 ‘마른안주’로 나뉜다.
젖은 안주는 오는 이의 취향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진다. 고즈넉한 ‘소설’에 앉아 그 분위기에 취해있다 보면 주인공 성준이 피아노를 치고, 예전과 농을 주고받으며 사랑에 빠지는 장면이 떠오를 것이다.
이번 주엔 홍상수 감독의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좋은 사람들과 북촌의 어느 작은 술집에서 술 한 잔 하며 얘기를 나눠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