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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FAC Nov 25. 2019

능동적이 되는 방법을 아세요?

be aggressive b.e. aggressive

언제부턴가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

아마 몸이 아프고 나서부터가 아닌가 라는 짐작을 해본다.


뉴욕에서 대학교 재학 시절 젊음 하나 믿고 하루도 쉬지 않는 나날들을 보냈다.

과제가 없는 날이면 그냥 길거리를 나섰다. 마치 매일매일을 가만히 있으면 무슨 큰일이라도 생기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5년을 보내고 나니 체력이 결국에 바닥이 나서 미국에서 난생처음 하루 동안 병원신세를 졌고 그때 정신이 들었다.

너무 쉼 없이 달려왔구나 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한 동안 심하게 고생을 하고 나니 쉬고 싶었다. 기약 없이. 쉬는 것이 질려서 일하고 싶어서 미치고 싶을 때까지 말이다.


그때는 돈에 대한 개념이나 욕심이 지금보다 훨씬 없었다.

돈이 없는 것에 대한 무서움이 몸으로 와 닿지 않았다.

어떻게 되겠지 라는 생각이 은연중에 깔려있었다.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계속 쉬었다. 몸이 그만 쉬어 이제는 이라고 말해줄 때까지. 그런데 그 기간이 꽤 오래 지속되었다. 쉬니까 쉼이 쉼을 부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꽤 오랜 시간을 휴식을 취했다. 그렇게 휴식을 취하다 보니 사람들과 융합할 기회들이 적었고 나만의 세상을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지금 생각을 한다. 사람들이 간혹 내게 소통의 부재, 생각을 더 깊이 해야 한다는 말들을 할 때, 사실상 내가 도대체 어떤지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런가 보다 하는 것은 있지만 반드시 그게 어떻게 문제가 되는 건지 알지 못했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아닌 주변에 관심을 가지면 어쩌면 더 빨리 개선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보는 나는 아직도 환상을 꿈꾸는 여자아이 그대로 일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멋지고 완벽한 남자를 꿈꾸는 지도, 내가 가질 많은 것들을 상상하곤 하니까. 그래서 더 현실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건지도 모르겠다. 마치 내 삶이 정말 내가 원하는 것처럼 풀리지 않을 때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음악이나 영화, 책 등으로 도망치듯이. 내가 직면해야 하는 문제들을 알고는 있지만 그것을 정면으로 똑바로 바라보고 해결을 하기에는 겁이 나는 것이 그러한 감정이지 않을까? 그래서 미루다 미루다 결국 나에 대한 실망감만이 자리를 잡는다.


기분이 어쩌면 가장 정확한 시그널이라고도 한다. 내 감정을 정확히 인지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가끔씩 내 감정을 등한시할 때가 있다. 가령, 내가 먹고 싶은 것은 이 만큼인데 감정적 허기 때문에 그것보다 많은 양을 욱여넣고서는 빵빵해진 배와 더부룩함 불쾌함을 고스란히 느낀다.


언제부터 이렇게 겁쟁이가 되었을까?

무엇이 그렇게 두려운가? 다 똑같은 사람일 뿐인데.

사람이 무엇인 것인가 그 감정이 두려운 것인가. 전에 느꼈던 기억이 두려운 것인가. 가장 적극적이었을 때가 언제였을까?


ynnej 가 내 인생의 첫 두려움이었을 거다. 항상 분노의 감정을 느꼈던 첫 대상이었으니까. 그리고 항상 내가 양보했고 졌고 이기지 못했다. 굴욕감도 많이 맛봐야 했다. 내가 갖고 싶은 것들을 가질 수 없다는 감정이 참을 수 없었지만 내가 그 상황을 바꿀 수 없었다. 화가 나고 때려 부시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감정을 억눌렀다. 한 번은 표출했다가 더욱더 기분 나쁜 감정을 느낀 경험이 있어서 그 뒤로는 더욱 감추게 되었다. 또 싸워봤자 내 감정에 치우쳐서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내 모습이 너무 싫어서 대화를 단절시켰다. 그래서 그런지 ynnej와 비슷한 사람들을 기피하기 시작했다. 예쁘고 자신만만하고 자기 잘 난 맛에 사는 사람들을 보면 왠지 ynnej를 만난 것과 동일한 감정을 느끼게 되고 오히려 높은 창을 올려서 막았다. 그래서 피하게 되고 도망치게 된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ynnej가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때 그 시절 힘없고 연약한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것도 깨달아야 한다. 


비슷한 사람에게서 비수처럼 꽂히는 비난을 받고 싶지 않은 것일까? 그랬던 적이 없지는 않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몇 번은 그런 말들을 들었었다. 처음에는 너무나 상처를 받고 아픈 말이었는데 나중에는 그것도 무덤덤해지더라. 그런데 그게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 말들을 듣고 나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나중에는 아니 아직은 완전히 무뎌지지는 않았지만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하고 가만히 듣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말하지 왜 아무런 변화를 하지 않냐고. 똑같은 실수, 행동, 패턴을 계속 가지고 간다고. 고민하고 노력한 흔적이 전혀 없다고 말한다. 듣지 않기 시작한 게 아닐까? 내가 받은 상처들이 너무 크기에 나는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듣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나에게 아픈 말들을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나를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라고 생각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참다가는 언젠가는 터지겠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래서 다른 방향성을 찾아야 하겠지. 


가끔 자신이 왜 특정 행동과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가령 주말에 내 머릿속은 어딘가를 가자고 이야기를 한다. 할 것들을 머릿속에 순식간에 나열해서 세워놓고 머리로는 계속해서 잡생각이 돌아간다. 하지만 몸은 움직이지를 않는다. 내 손에는 스마트폰이 담겨있고 

유튜브를 뒤적이다가 보고 싶지도 않은 클립을 이리저리 눌러가며 빨리 감기로 넘어가면서 보는 것을 반복한다. 

그러다가 이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눈이 피곤해져서 끄고 잠을 청해 본다. 

주말에 일을 하면 평일에 야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알지만 그러고 싶지가 않다. 하지만 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거기서도 수십 번의 고민을 한다. 그러다가 결국엔 일을 하자고 마음을 먹게 되지만 그 결정을 하기까지는 상당한 머릿속의 회로들을 거쳐서 도달한다. 


회사에서 또한 제삼자 입장에서 보는 나는 어떨까 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본다

대리. 여자. 평판이 그지 같음. 친한 사람이 없음. 30세. 관심 없음. 이 정도가 아닐까? 뭐 그보다 더 안 좋았으면 안 좋았지 좋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왜? 내가 이런 이미지/생각을 심어줬을까?

글쎄 첫 단추가 좋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지금도 참 창피하지만 다시 돌아간다면... 바뀌었을까?


안다. 내가 희생정신이 참으로 약하다는 것을. 한 없이 이기적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내 생각으로 똘똘 뭉쳤으니까. 고집 세다는 얘기를 한 두 번 들어본 것도 아니고 연애할 때도 걸림돌이 되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내가 원하는 일에는 적극성인 모습을 보였을까? 내가 언제 가장 적극적이었고 무엇을 할 때 적극적이고 눈이 반짝거릴까? 사람들은 먹는 것 앞에서 혹은 예전에 키우던 강아지 얘기를 할 때면 눈빛이 달라진다고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먹기만 해서는 차별점이 아무것도 없다는 게 먹는 걸로 먹고살 수가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심지어 사업도 맛집 소개를 함으로써 내가 많이 먹을 수 있기를 바랐지만 사실상 딱히 그러지도 못했다. 돈을 벌어오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엔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직업이었다. 적어도 처음에 내가 알려지기 전까지는. 


살면서 언제 가장 적극적이었던가. 가물가물한 거 보면 조금 심각성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적극적이었던 순간을 찾기 힘들다면 무엇을 제일 열심히 했는가를 찾아보는 것도 방법이다. 대학교 2학년 때 들었던 Richard Wilde의 Visual Literacy 수업의 과제는 굉장히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난다. 왜? 인정받고 싶고 내 작품이 앞에 보이기 원했고 리처드가 직접 손으로 써주는 점수와 코멘트가 기대되었다. 그리고 과제의 형식이 매우 자유로웠다. Frank Young의 Graphic Design 수업도 열심히 했었다. 매주 새로운 영감을 받을 수 있었고 내 눈을 진심으로 똑바로 봐주었고 들여다봐주었다. 다음으로는 뉴욕에 살 때 열심히 돌아다닌 것. 정말 누구보다 많이 돌아다녔다는 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발의 모양이 망가질 정도로 다녔으니까. 


그런데 왜 멈췄을까. 언제부턴가. 적당히. 눈에 띄지 않게. 뒤로 숨어버리는 속성이 생겨버렸다. 못한다는 생각이 들 때 그렇다. 비교될 때, 뒤쳐질 때 그렇다고 느껴질 때 한 없이 나만의 새장에 들어가서 자물쇠로 꽁꽁 잠가버린다. 도피겠지. 무서워서. 비난이. 조롱이. 무시가. 고깝게 보는 것이. 그 세장에서 이제는 나올 시간이 된 것 같다. 그 새장 안이 너무나도 답답하다. 이제는 날고 싶다. 훨훨 높이 찬란하게 자유롭게. 아무 한계 없이. 


그러려면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지나치게 생각을 많이 하는 습관은 버려야 한다. 지구는 넓고 그 고민은 한 없이 자그마한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고민에 지나지 않는다. 연차를 언제 낼지, 휴가를 언제 갈지, 쟤는 왜 저러지 하는 그 작은 것들을 고민하기엔 우리 시간이 너무 짧고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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