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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귀

처마밑은 위험했어

by 로파이

어릴 적 일주일에 한 번씩 약수터에서 물을 떠다 마셨다.

할머니가 주시는 심부름값 천 원을 받기 위해 동생과 나는 주말 반나절 동안 약수터를 다녀와야만 했다.


우리 동네 유명한 약수터는 세 곳이 있었는데

할머니께서는 꼭 맨 아래 물은 떠오지 말라 하셨다.


- 맨 윗 산 약수터는 위험하니 동생이랑 올라가지 말고, 꼭 그 산 아래 절에서 떠와야 한다.

- 맨 아래 약수터는 안된다.

- 할머니는 딱 마셔보면 어디서 떠온 물인지 알아. 알지?


동생은 등에 가방을 짊어지고 1.5리터 페트병을 구겨 넣었고

나는 나만한 구르마에 큰 말통 두어 개를 줄로 칭칭 동여 메고

아이들 걸음으로 꽤나 오랜 시간 둘이서 걸어야만 했다.


위기는 첫 약수터다.


"동생아 그냥 여기서 뜰까?"

"안돼 할머니가 어디서 떠온 물인지 아시잖아.."


이상하다..

할머니는 대체 어떻게 아시는 걸까? 약수터 물에 맛이 정말 있는 건가??


"그래 그럼 조금 더 올라가서 절에서 떠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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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면 이미 물을 뜨러 오신 분들이 꽤나 많은데,

누구는 페트병 누구는 주스병 또 누구는 말통

알록달록한 빈 물통들로 길게 오시는 순서대로 줄을 세워두신다.


물통에 새치기는 없다.


약수터에는 우리들만에 규칙이 있는데

행여나 물통 주인이 그 자리에 없다 한들 주인 없는 물통을 외면하지 않고 물을 받아 둔다는 것이다.


약수물이 다 받아진 물통 입구를 꼭 잠가 옆에 빼 두면

자리를 비웠다가 찾아온 물통 주인은 연신 감사하다는 인사를 주시고는 자리를 뜨셨던 장면을

그간 많이 목격해 왔기 때문에 내가 배운 우리 약수터의 규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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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많이 변해있을까?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아두던 그곳은 아직도 있을까?


며칠 전에 갑자기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어른이 되어서 다시 찾아가 보니 놀랍게도 어렸을 적 기억이 또렷이 났다.


약수터 물을 뜨러 오신 분들은 계시지 않았지만

아직도 변하지 않고 여전히 맑은 물이 산에서 내려오고 있는 걸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아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리움과 아련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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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걷다 보니 비 오던 그날이 생각났다.


그날은 물을 뜨러 가는 길에 비가 왔다. (할머니가 비 오는 날 물은 뜨지 말라고 했는데..)

함께 약수터에 갔던 동네 친구들과 나는 처마 밑에서 비를 피했다.


하늘에서 지붕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처마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어찌나 마음 편안하던지

처마 밑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손바닥으로 받고 있으니 옆에 친구가 이야기했다.


- 비가 오는 날 처마 밑에 떨어지는 물을 손에 맞으면 사마귀 생긴다고 했어

- 이거 봐 봐 일 년 전에 그래서 생긴 거라고 그랬어


"에이 그런 게 어디 있냐? 누가 그랬어?"


- 우리 엄마가 그랬거든?


그 뒤로 한참을 나는 내 친구 엄마의 말씀을 믿었다.


아마, 친구 부모님께서는 지붕에 쌓인 알 수 없는 먼지가 많으니 비 오는 날 처마에

씻겨 내려온 빗물을 맞지 말라는 말씀이셨을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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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처마 밑이었다.


비가 올 때면 가끔 동네 처마밑에 서있던 내가 생각이 날 때가 있다.


내 친구들은 다들 부모님이 데리고 가는데

나는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거나 처마에서 떨어지는 사마귀를 피해 집으로 비를 맞으며 뛰어가야만 했다.


지금 생각해 봐도

나는 참 불쌍한 아이였다.


여전히 나는 참 불쌍한 아이로 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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