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운함을 표현하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자.
새로운 직장에 들어가 정말 힘들었던 한 해가 있었다. 나와 맞지 않는 업무처리, 이해할 수 없는 상사들, 나에게 주어진 너무나 큰 일들. 직업 특성상 1년은 채워야 하는 탓에 정말 이를 악물고 참았더란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더 끈끈한 동지애가 생겼다. 특히 같은 팀이었던 동료들과는 정말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친해졌다. 야근을 하지 않아도 일과가 끝나면 으레 함께 저녁을 먹고 헤어졌으며, 직장에서 만났다고 이야기하면 믿지 않을 만큼 10년 지기 친구들처럼 장난을 치고, 매일 붙어있으면서도 주말까지 만나 시간을 함께 했으며, 휴가를 맞춰 함께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그렇게 힘들었던 1년을 그들 덕분에 버텼다.
힘들었던 1년이 지나고, 나는 그 직장을 그만두었다. 아무리 동료들이 좋아도 나와 맞지 않는 곳에 더 이상 있을 수 없었기에. 나머지 동료들은 그곳에서 더 일을 하기로 했다. 우리는 떨어져도 함께할 거라며 눈물로 헤어졌다.
떨어진 뒤에도, 아니 나만 떨어져 나간 뒤에도 우린 자주 함께였다. 서로 일과가 끝난 뒤에 만나 밥을 먹고, 주말에는 만나 놀러 다녔으며, 늘 단톡방은 시끄럽게 울려대고는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횟수는 뜸해졌다.
점점 약속을 잡는 것이 힘들어졌으며, 그러다 보니 연락하는 횟수는 적어졌고 서로 조심스러워졌다. 그러다가 오랜만에(라고 해봤자 몇 주만에) 만나게 되어 시간을 함께 하면서도 나만이 모르는 그들만의 이야기가 많아졌으며, 결국 그들만이 함께하는 일들이 많아졌다.
서로 일하는 곳이 다르고 상황도 달랐기에, 함께 일했던 때처럼 퇴근 5분 전에 "나 오늘 고기 땡긴다. 먹으러 가자!" 하며 갑자기 먹으러 가자고 하기에는 어려웠으니까. 그들끼리 갑자기 밥을 먹게 되었을 때 나에게 연락하는 것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고민 끝에 나를 불렀을 것이고 그 상황에서 나는 시간이 맞지 않아 몇 번의 거절을 했을 것이다. 그런 고민들과 거절들 끝에 그들끼리 밥을 먹는 일이 생겼다. 그런 고민뿐 아니라 그저 배고프니까 밥을 먹고 가자며, 가볍게 밥을 먹고 헤어지는 상황도 많았을 것이다.
'그래, 모두 함께 일을 할 때와는 다른 거다. 그래도 함께하는 시간들이 있으니, 계속 함께하고 있으니 괜찮다.'라며 이해했다.
'아무리 그래도 연락 한 번만 주지, 나도 시간이 괜찮았을지 모르는데. 나도 그 식당 참 좋아하는지 잘 알면서.' 이해한다면서도 그들만이 함께하는 순간들을 알게 될 때마다 조금씩 서운함이 쌓여갔다.
하지만 이야기할 수 없었다. 이해했으니까.
이해한다면서 서운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모순 같았다. 소심한 것 같았다. 그래서 괜찮아지려 했다.
비단 위의 상황뿐만이 아니다.
남자 친구를 만나기로 했는데 갑자기 야근을 하게 되어서 만나지 못할 때, 이해하지만 서운했다.
친구와 약속을 했는데 몸이 좋지 않다면서 약속을 취소하게 됐을 때, 이해하지만 서운했다.
나의 생일날, 부모님께서 일이 생기셔서 축하받지 못했을 때, 이해하지만 서운했다.
친구와 매년 함께하던 날, 남자 친구와 약속을 했다며 취소할 때, 이해하지만 서운했다.
그렇지만 늘 나는 괜찮다, 이해한다, 그럴 수 있다며 웃어 보였다. 이해했으니까.
그런데 누군가가 이야기했다.
이해는 이성의 영역이고 서운은 감정의 영역이기에 모순된 것이 아니다.
그렇다. 이해하지만 서운하다. 모순이 아니다. 이해하지만 서운할 수 있다. 그리고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나의 서운한 감정을 상대방에게 솔직히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서운함을 표현하는 것도 "네가 어떻게 나에게 그럴 수가 있어!"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의 감정을 이해해달라는 것이니까. "그랬었구나."라는 말 한마디면 위로가 되는 것일 테니까. 나의 이야기를 들은 상대방도 이야기해줘서 고마워. 미안해. 사랑해.라고 이해해 줄 테니까.
이러한 감정을 갖는 것에 대해서 결코 모순된 감정이 아니니 그 말을 꺼내는 것에 대해 속상해하지도 소심하게 생각하지 말자. 마음 그대로 솔직하게 표현하고 서로 그대로 받아들여준다면, 소중한 인연들은 영원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