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오빠와 그동안 함께했던 몇몇 친구들은 일정상 버스를 타고 레온으로 점프하기로 했고, Y님은 30km 다음 마을인 나헤라까지 걷는다고 하셨다. 발이 아팠던 나와 H는 13km 다음에 있는 나바레떼까지만 걷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알베르게 로비에서 모두와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누고 H와 함께 출발했다.
비 오던 로그로뇨
근데... 못 걷겠다.
그동안에는 발에 통증이 있어도 참고 걸을 수 있는 정도였는데, 처음 생긴 양 발의 큰 물집들은 걸을 때마다 쯔억쯔억 물이 새어 나오고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한 블록도 더 걸어갈 수가 없었다. 도저히.
결국 나는 "못 걷겠다."라고 말해버렸다. 일단 지금 상황에서는 도저히 걸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 아파서 오늘 로그로뇨에서 하루 더 쉬거나 버스를 타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H에게 함께 하자고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나만의 길이 있고, H는 H만의 길이 있는 거니까. 나로 인해서 어떤 부담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H가 이야기했다. "같이 버스 타죠!"
사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며칠을 함께 걸었다고 이렇게 선뜻 함께 버스를 타자고 하는지, 분명 모두가 산티아고 완주를 꿈꾸면서 올 텐데 말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나 고마웠다. 빈말이라도 함께 버스를 타자고 이야기해주다니.
나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나는 쉬어야 할 것 같으니 먼저 가라고 거듭 이야기했지만 H는 함께 버스를 타자며 버스 시간표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고마웠다. 아플 때 함께 할 사람이 있다는 것이. 만약 혼자서 버스를 타거나 로그로뇨에서 쉬었다면 마음이 많이 약해졌을 텐데 말이다. (나중에 물어보니, H는 산티아고가 처음으로 혼자 온 여행이었다고 한다. 씩씩하게 혼자 여행을 왔지만 처음부터 좋은 일행들을 만났고 함께해서 즐거웠는데, 이 날이 H에게는 일행들과 처음으로 헤어지는 날이었던 것이다. 혼자 여행이 익숙했던 나조차도 힘들었는데.. H의 첫 여행지에서의 이별은 너무나 크게 다가왔으리라.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과 헤어지니 무척 속상해졌고, 나와도 헤어지면 지금이라도 이 길을 그만둘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함께 하고 싶었단다.)
로그로뇨 버스 터미널
그렇게 둘이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처음에는 우리도 다른 일행들을 따라 레온으로 갈까? 하다가 그러기에는 남은 일정도 많았고 순례길이 아쉬울 것 같아서 하루치 거리인 나헤라로 점프하기로 했다.
다행히 나헤라로 향하는 버스는 시간대가 다양해서 3시 반 버스를 예매할 수 있었다. (로그로뇨에는 한식이 그리운 순례자들에게 꼭 가보라고 추천하는 중국식 뷔페 WOK이 있는데, 어제 늦게 도착해 가지 못했었다. 무척 아쉬웠었는데... 오늘 버스를 타는 김에, 시간도 많이 생겼겠다! 점심을 WOK에서 먹고 버스를 타기로 했기 때문이다 :) 그렇게 버스를 예매하고 아침을 먹으니 11시. WOK이 문을 열기까지는 두 시간이 남아있었다. 우리는 돌아다니다가 로그로뇨 성당에 들어가 앉았다.
로그로뇨 성당
성당에서 밀린 일기를 쓰며 멍하니 앉아있으니 너무나 많은 생각이 들었다. 아마 조용한 성당에 앉아 있다 보니 더 많은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버스 예매를 하고 온 후라 더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걸어가야 한다면 8시간은 꼬박 걸어야 하는 30km 거리가, 버스를 타니 1시간에 1.7유로라는 가격으로 갈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 짧은 시간과 싼 가격에 갈 수 있는 거리를 왜 걷고 있는 것인가 하는 기본적인 물음에 더 현타가 왔다.
또한 발이 너무나 아파서 어쩔 수 없이 한 선택이었지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많아졌다. 이 물집은 하루아침에 나아지지 않을 텐데, 이 고통을 치료를 하면서 계속 걸을 수 있을지도 걱정이었다. 그리고 만약 앞으로 내가 계속... 버스를 탈 생각을 하게 된다면 어쩌지.. 하는 생각들도 한편에 자리 잡았다. 나 스스로에게 많이 실망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마 내 의지로 타는 첫 버스였기에 더 그랬던 것 같다.
그래도 성당에 앉아 이러한 생각들을 한 덕분에 이후의 순례길에 대해 더 많은 생각과 방향을 얻을 수 있었다. 내가 걷는 이유, 앞으로 어떻게 걸을지에 대한.
처음에는 이렇게 물집 하나에 바로 버스를 타게 된 내 모습이 실망스러웠다. 특히 나는 나에게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기 위해 산티아고에 온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내 아프면 쉴 수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몸은 내가 제일 잘 알고, 지금 상황에서는 걷지 못할 것이라는 것. 괜히 무리해서 걷다가 중간에 낙오하거나 탈이 나서 앞으로의 일정이 어그러질 수 있다는 생각이 컸다. 그리고 산티아고를 시작할 때 다짐했던 것, 무리하지 말자. 무리하면 어떤 일도 결국 끝에는 탈이나 완성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사람들과 함께 무리해서 걷다가 결국 물집이 생긴 것이었으니까. 무리하지 말자!
그리고 산티아고를 시작한 것만으로도 나는 대단하다고.
이 생각들은 나를 다잡아 주었고 조금은 힘을 낼 수 있었다.
몸이 아프니 참 마음이 약해지는 것 같았다. 이래도 되나, 내가 하는 선택이 맞는 것인지 하는 걱정과 두려움. 물론 그 선택이 순간의 힘듦으로 선택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나를 믿어주는 것이다. 나의 선택이니까. 어떤 선택을 하던 나를 믿어주는 것. 나를 믿고 나를 따라가는 것. 이번에도 나는 나를 믿어주기로 했다.
현타의 시간을 갖고 간 WOK. 그곳에서 J를 만났다. 길가며 인사만 하던 사이였는데 혼자 밥을 먹으러 왔기에 함께 식사를 하게 된 것이다. J도 산티아고에서 만난 일행들이 있었는데 너무나 한식이 먹고 싶던 나머지, 일행들과 헤어지고 혼자 WOK을 먹으러 왔다. 점심을 먹고 나헤라로 걸어갈 생각이라고 했다. 그렇게 서로의 이야기를 하며 순례길에서 처음 만난 매운 음식과 싱싱한 해산물에 너무나 행복해져 정말 신나게 먹었다.
함께 식사를 하며 H는 J가 마음에 들었는지 (둘 다 여자다, 말이 잘 통한다는 뜻!) 함께 버스를 타자며 계속 이야기했고 우리와 너무나 신나게 떠들다가 출발 예정이었던 2시가 훌쩍 넘고 3시가 된 상황이라 고민하던 J는 결국 우리와 함께 버스를 타게 되었다. (사실 이렇게 간단하게 설명하지만... 거의 납치가 되다시피 버스를 함께 타게 되었다ㅋㅋ 그래도 나헤라에서 이전 일행들도 만나게 되었고, 이후에는 우리와 일행이 되어 함께하는 계기가 되었기에. 한국에서도 만나면 늘 이 이야기를 하며 함께 즐겁게 웃고는 한다 :)
그렇게 1.7유로, 1시간 만에 도착한 나헤라!
처음 나의 의지로 점프를 해 현타가 오기는 했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무언가를 포기할 수도 있어야 한다. 물론 내 발로 이 길을 온전히 걸을 수 있다면 너무나 좋았겠지만, 그 길을 내 발로 다 걷겠다고 무리한다면 이 길을 끝까지 걷지 못할 수도 있기에.
앞으로를 위해서 과감하게 포기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
또한 더 많이 점프하지 않음에, 그리고 로그로뇨에서 쉬지 않음으로 새로운 인연을 만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