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지나가겠지, 노잼 시기

190406 Day5. 에스떼야 - 로스 아르코스 21.7km

by YEON

산티아고 순례길에는 보통 5km에 하나씩은 작은 마을들이 있어서 중간중간 휴식도 취할 수 있고, 마을도 구경하며 지루하지 않게 걸을 수 있다. 하지만 가끔 긴 거리를 걷는 동안 마을도 바도 하나도 없을 때가 있다. 꼭... 인생의 노잼 시기처럼.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포도밭

일찍 일어나 간단히 식사를 하고 일출을 보며 출발한 아침. 걷는 중간중간 끝도 없이 펼쳐진 포도밭도 보였고, 유명한 이레체 와인 수도꼭지도 구경했다.(와인을 마셔보기 위해 일찍 출발했는데 아쉽게도 내가 도착한 8시쯤에는 와인이 나오지 않았고, 이후 10시쯤 도착한 사람은 와인을 마실 수 있었다고 한다ㅜㅜ 인생은 타이밍이다..) 그리고 윈도우 배경화면에서나 볼 법한 풍경들을 실컷 본! 나름 괜찮은 날이었다.

너무나 아름답던 풍경과 사진만 찍은 이레체 와인 수도꼭지

근데 기분이 좋았던 것도 잠시. Villamayor de Monjardin 마을 이후부터 12km 동안 아무것도 없었다.

윈도우 배경화면처럼 길게 펼쳐진 평야와 아름다운 구름. 하지만 아름다운 풍경도 한순간이지, 정말 아무것도 없이 계속 걷기만 하다 보니 예쁜 풍경도 소용이 없었다. 심지어 오늘은 날씨도 너무나 좋아, 해가 뜨는 순간부터 기온이 계속 올라가고 있었다. 너무나 덥고 지루한 상황. 그냥 걸으면 되겠지.. 하며 별다른 준비도 하지 않았는데 처음으로 맞이하는 긴 구간에 정말 힘들었다. 신나는 노래를 듣기도 하고, 그늘이 나오면 철퍼덕 앉아 쉬기도 하고, 비상식량으로 싸온 과일들을 먹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다행히 같이 걷는 Y님이 계셨고 중간에 만나게 된 오아시스 같은 푸드트럭이 있었기에 무사히 도착지인 로스 아르코스까지 갈 수 있었지만 정말 힘들고 지루한 길임은 분명했다.


이 길을 걷다 보니 문득 든 생각이 있었다.

가끔 찾아오는 무기력함.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고, 의욕도 없어지고, 우울해지는 인생의 노잼 시기가! 꼭 긴 거리 동안 아무것도 없는 지루한 순례길이 노잼 시기와 비슷한 듯해서.


20대 후반이 지나고, 30대가 되면서 주기적으로 노잼 시기가 찾아왔다.

뭘 해도 재미없고, 아무것도 하기 싫고. 그냥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 우울함. 처음에는 딱히 이유도 모를 우울감에 당황스러워서 이것저것 많이 했다. 하지도 않던 취미 생활을 시작해 보기도 하고, 운동도 다녀보고, 약속도 많이 잡고 여기저기 놀러 다녔더란다. 물론 취미 생활을 하고 친구들을 만나 놀 때면 재미있었다. 하지만 그때뿐.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오히려 더 큰 허탈함과 공허함이 밀려왔다.

또 어떤 때의 노잼 시기는 정말 우울증인가? 싶을 정도로 심하게 오기도 했었다. 정말 이때에는 '그냥 지금 죽더라도 크게 슬플 것 같지 않다.'라는 생각조차 했었다. 정말 인생이 재미없었으니까. 그렇다고 자살을 할 용기는 없고, 그냥 지나가다 사고로 죽는다면.. 이 재미없는 인생 더 안 살아도 되니 다행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에도 평소 하던 일은 계속해나갔다. 아니, 할 수밖에 없었다. 꾸준히 평소처럼. 어떤 것도 재미는 없고 의미도 없지만 내 할 일은 해야 하니까. 그만둘 수는 없으니까.

그러다 보면,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 보면 어느새 또 나아졌다. 조금씩 재미있는 것이 생기고, 흥미도 생기고, 인생도 즐거워지고.

처음에는 '노잼 시기가 오면 어떡하지?' 하며 앞서 말한 것처럼 취미생활, 운동, 약속 등 이것저것 미리 준비했었다. 그렇지만 몇 번의 노잼 시기가 지난 후 알았다. 무언가를 준비하고 기다리는 것도 좋지만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어차피 올 시기라면 그냥 지나가기를 기다려주는 것도 방법이라고. 언젠가는 지나갈 테니까, 반드시 지나갈 테니까. 그리고 이 시기를 통해 평소와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것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되어서 조금 더 성장한 내가 될 테니까.

기다려주자고.


순례길처럼 미리 알 수 있어서 '아, 이제 노잼 길이 구나. 힘내자!'하고 다짐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미리 알 수 없더라고 어차피 겪어야 할 시기라면 '그래, 인생이 그런 거지. 언젠가는 지나가겠지.' 하며 차분히 기다려주는 것도 노잼 시기를 대처하는 방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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