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내문을 따르면 안전하지..만
재미는 못 느꼈겠지?

190405 Day4 시즈루메노르 - 에스떼야 26.8km(+14.1km

by YEON

전날까지는 날씨가 너무나 좋았는데 오늘은 하루 종일 비 예보가 있더니, 아침부터 바람이 심상치 않게 불었다. 일출을 바라보며 조금 걷다 보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주섬주섬 우비를 입으려 하는데 바람이 너무나 심해 혼자서는 도저히 우비를 입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어제 알베르게에서 만난 두 분과 함께 출발한 상황이라 서로 도와 우비를 입고 다시 출발할 수 있었다.

용서의 언덕

보통은 출발 전에 '오늘은 여기까지 가야지' 하고 계획하곤 했는데 오늘은 딱히 목적지 없이 걷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부터 좋지 않았던 다리가 조금씩 아파오기 시작했고,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기 전 한국에서 연습을 한다며 매일 둘레길을 걷다가 발가락에 작은 물집과 티눈이 생겼다.) 오늘의 하이라이트! '용서의 언덕' 앞 뒤로 급격한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다고 표시되어 있었기에 걷다가 내 몸 상태를 보고 어디서 쉴지 결정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걷다가 도착한 푸엔타 라 레이나.

보통 팜플로냐에서 묵은 사람들이 그 다음날 묵는 마을이었지만, 나는 시즈루 메노르에서 묵었기에 푸엔타 라 레이나에서 쉬기에는 조금 아쉬운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5km만 더 걸어서 다음 마을까지 가자! 하고 출발하였는데.. 욕심이었는지 마을 도착 전부터 다리의 통증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마네루에서 쉬기로 하고 함께 걷던 두 분은 다음 마을까지 가시기로 하였다. 두 분과 마을 입구에서 헤어지고 혼자 알베르게를 찾아갔는데... 이런! 알베르게가 문을 열지 않았다. 마을에 있는 알베르게 두 군데 모두 다...! 알고 보니, 아직은 4월 초 비수기라 작은 마을에서는 문을 열지 않은 알베르게가 많았던 것이다. 멘붕으로 어쩌지 하며 앉아있는데, 아까 헤어진 두 분이 슈퍼를 들렀다 오셔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결국 두 분의 도움으로 발바닥에 밴드를 붙이고 진통제를 먹고 함께 다음 마을까지 걷게 되었다.

꼭 동화 속에 나오는 마을 같았던 시라우끼

두 분이 머무시기로 하신 다음 마을인 시라우끼는 이곳에서부터 2.6km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조금만 힘을 내라며 많이 도와주셨다. 그렇게 발을 끌고 도착한 시라우끼. 먼발치에서 볼 때에는 동화 속에 나올 듯 언덕에 있는 마을의 모습이 아름다워서 발이 아픈 것도 잊고 사진을 찍으며 신나게 도착했다.

근데... 불안하다? 마을에 도착을 했는데 사람들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전 마을과 같은 싸함을 느끼며 알베르게가 있는 곳에 도착했는데..! 이런!!! 이 마을의 알베르게도 문을 열지 않은 것이다. 문을 닫은 알베르게 앞에는 우리 말고도 멘붕이 온 다른 외국인 순례자들도 많았다. 대부분 나와 같이 마네루에서 쉬려다가 알베르게가 열지 않아서 본의 아니게 더 걸어온 사람들이었다.

다음 마을까지는 5km 더 걸어야 하는 상황. 심지어 그 마을에 알베르게가 열었는지, 자리가 남아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정말 멘붕이었다. 겨우 발을 끌고 2km를 걸어왔는데, 문이 열지 않았다니! 심지어 다음 마을인 로르카 알베르게에 전화를 해 문의하니 침대가 2자리밖에 남지 않은 상황. 너무 힘들어서 나는 '그냥 여기 바닥에서 침낭을 깔고 노숙을 하겠다'며 정신을 놓고 있었다. 결국 여러 사람들의 대책회의(?) 후 내린 결론.

택시를 부르자!!

택시를 타고 알베르게가 많이 있는 큰 도시에 가기로 했다. 이제 결정할 사항은 걸어왔던 길을 다시 거슬러서 뒤에 있는 푸엔타 라 레이나로 가느냐, 점프를 해서 14km 앞에 있는 에스떼야로 가느냐 하는 것. 나는 무조건 에스떼야였다! 모든 길을 내 두발로 완주한다면 좋겠지만, 굳이 힘든 상황에서 무리하지 말자는 것이 시작하기 전 나의 다짐이었고 너무나 힘들게 걸어온 길을 다시 거슬러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 대부분 순례자들의 마음이 같은 상황이었고 고민하던 몇몇도 결국 에스떼야로 함께 가기로 하였다. 그렇게 9명의 대인원이 점프 동지가 되었다. 또한 다행히도 함께 있던 일행 중 스웨덴 친구가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여서 쉽게 택시를 부를 수 있었다. 조금 기다리니 도착한 나의 구세주 택시!!!

나의 구세주 택시

이렇게 본의 아니게 점프를 하게 될 줄이야. 만약 이때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무조건 택시를 타겠지만ㅋㅋ 점프를 하게 되는 상황은 정말 몸이 안 좋거나 불가피한 상황에서 할 거라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본의 아니게 택시를 타게 되니 조금 당황스럽기는 했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과 함께 웃으며 택시를 타 재미있는 경험으로 남았다.

순례길을 처음 시작할 때에는 생장 사무실에서 고도표와 알베르게 정보가 담긴 종이를 받는다. 특히 고도표에는 보편적인 사람들이 하루 걷는 거리를 계산해 34일 일정으로 나뉘어 소개하고 있다. 한마디로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정확한 안내문인 것이다.

'안내문이란 각종 정보를 전달하고 안내하기 위해 작성하는 문서이다.'

각종 정보,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걸었고 많은 일들이 있었고 많은 시간이 흐르며 쌓인 경험들을 바탕으로 하루하루 일정이 대략적으로 정해져 소개하는 문서라는 것이다. 근데 순례길을 며칠이나 걸었다고, 나름 팜플로냐에서 쉬지 않고 작은 마을인 시즈루 메노르까지 가서 쉬었다는 자신감에. 지금 같은 4월 초 비수기에는 알베르게가 열지 않을 수 있기에 최대한 큰 도시에서 묵어야 한다는 것을, 소도시에서 묵을 경우 숙소를 확인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지 않고 그저 걸은 것이다. 물론 성수기에는 작은 마을의 알베르게가 거의 다 열기에 걱정이 없지만 말이다. 그래서 이렇게 택시를 타면서 든 생각이 한 가지 있었다.

"하라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구나...."

그래도... 만약 안내문을 따라서 큰 도시들에서 쉬었다면 이런 어이없는 재미는 느끼지 못했겠지?


택시를 타고 20분 만에 도착한 에스떼야. 다행히도 에스떼야 알베르게에는 자리가 많이 남아있었고 지친 몸을 뉘어 쉴 수 있었다. 예상보다 더 걸었고 멘붕까지 겪어 무척 피곤했기에 불편함도 모르고 기절하듯 도착하자마자 쉬었다. 조금 쉬다가 저녁시간. 이것도 인연이라고 택시를 탄 일행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저녁식사를 하면서도, 나중에 다시 만나서도 이때 택시를 탄 이야기를 서로 하면 세상 재미있던 일인 듯 깔깔거리고 웃고는 했지만 만약 혼자서 문을 열지 않은 알베르게를 맞닥뜨렸다면.. 정말 힘들었을 것 같다.


또한 14km나 점프를 하게 되어서 '이제는 이전에 만났던 분들 중 미국 어머님과 Y님 말고는 아무도 만날 수가 없겠구나.'라고 생각했었는데, 수비리에서 함께 밥을 먹었던 H도 우리가 택시를 탔던 마을에 뒤늦게 도착해서 결국 택시를 타고 에스떼야까지 오게 되었고, 앞서 걷고 있던 J오빠도 이 날 에스떼야에 도착해 수비리에서 함께 점심식사를 한 모두가 에스떼야 알베르게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러니 이들과는 어찌 운명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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