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걷던 언니들은 알베르게의 아침을 신청했지만 나는 신청하지 않았기에, 식당 자판기에서 빵을 하나 사 주머니에 넣고선 따로 출발하게 되었다.
아침부터 비가 내려 우비를 입고 출발한 이틀 차. 어제 저녁식사를 함께 한 미국에서 오신 한국인 어머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걸었다. 비 내리는 숲 속과 예쁜 마을을 지나며 왜 순례길에 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삶에 관한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 주셔서 재밌게 걸을 수 있었다. 단지 어머님의 속도가 너무 빠르셔서.. 도저히 오르막길에서는 이야기를 나누며 따라 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중간에 먼저 가시라고 말씀드린 후, 다시 혼자 걷게 되었다.
그렇게 혼자 노래를 들으며 신나게 걷던 나. 배가 고파져 빵을 먹으려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없다? 어디 갔지, 내 빵?
하아.. 아마 걷다가 주머니에서 빠진 것 같았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배가 많이 고프지 않아 걷다가 나오는 바(Bar)에 들어가서 아침을 제대로 먹자, 싶었다.
괜한 패기로 들어가지 않아 후회하게 된 이날, 나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바
그렇게 걷다가 첫 번째 바가 나왔는데, 이상하게 그 바에 들어가고 싶지가 않았다. 비도 많이 내렸고 배도 고팠던 상황이었는데 말이다. 걷다 보면 다른 바가 있겠지? 다음에 나오는 바에 가서 뭐라도 먹자! 하고 출발했던 것이.. 고난의 시작이었다.
나의 배고픔을 달래주었던 비상식량, 귤
어찌 된 일인지, 출발 후 도착하는 마을마다 사람도 없고 문을 연 음식점조차 보이지 않았다. 다음 마을에는 있겠지, 뭐라도 있겠지 하며 걷기를 3시간. 점점 더 배가 고파지고 힘들어졌다. 심지어 비까지 내려, 앉아서 쉴 곳도 마땅치 않은 상황. 결국 걸으면서 비상용으로 사놓았던 귤로 배고픔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렇게 걷는 시간 동안 순례자를 단 한 명도 만날 수가 없었다. 전날 피레네에서도 언니들과의 걷는 속도가 달라 혼자 걷는 시간이 많았지만, 그때는 앞뒤로 순례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혼자 걷는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근데 앞뒤로 아무도, 정말 아무도 없는 길을 걸으니 2일 차밖에 되지 않은 나에게는 '내가 맞는 길로 가고 있는 것인지' 확신도 서지 않고, 너무 무섭고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노란 화살표가 눈 앞에 있는데도 말이다.
그러던 순간, H와 J오빠를 만나게 되었다!
혼자 비를 맞으며 온갖 걱정과 배고픔에 멘붕이 와,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걷고 있던 나에게 저 멀리 걸어오며 밝게 인사를 건넨 두 사람. 정말 너무나 반갑고 고마웠다. 심지어 말이 통하는 한국인이어서 더더욱!! 처음 만난 사람이었음에도 오늘 있었던 나의 속상함을 털어놓으며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하며 함께 걷게 되었다. 그러니 힘이 조금 났다. 아까는 정말 멘붕으로 쓰러지기 직전이었는데 말이다. 그렇게 함께 점심식사를 하기로 하고 걷게 되었고, 걷는 길 중간에는 식사할 곳이 없어 결국 오늘의 목적지인 수비리까지 가서야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오늘 나에게 힘이 되었던 두 사람과 그 두 사람이 전날 만났던 Y님까지 함께 점심을 먹게 되었는데, 심지어 4명이 모두 비슷한 직업군이라 신기해하며 즐겁게 식사를 하게 되었다.
멀리 보이는 수비리 (순례길 중 최단시간 기록ㅋㅋㅋ)
J오빠는 다음 마을까지 걸어갈 계획이었기에 점심을 먹고 헤어지게 되었다. J오빠가 떠난 후에도 나머지 사람들은 서로 숙소가 달라 그저 길에서 다시 만나요.. 하며 헤어지게 되었는데, 이때 함께 식사한 3명은 이후 순례길의 새로운 일행이 되었고, 지금도 계속 연락하는 소중한 인연이 되었다. 그래서
정말 인연이라는 것은 있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냐,
만약 내가 론세스바예스에서 아침을 먹고 언니들과 함께 출발했다면 그 두 사람을 만났더라도 '아, 한국인이구나.' 하며 서로 인사하고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이렇게 점심을 함께 먹는 상황은 없었을 것이란 말이다.
아니, 만약 내가 첫 번째 바를 지나치지 않고 그곳에서 아침을 먹었다면. 만약 중간에 다른 바가 문을 열어서 그곳에서 식사를 했다면 두 사람은 나를 앞서서 걷게 되었을 테고 이렇게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내가 빵을 잃어버리지 않아서 배가 고프지 않았다면 처음 만난 두 사람에게 먼저 그렇게 반갑게 인사하지도 않았을 테고 어쩌면 점심까지 먹는 상황이 생기지 않았을 수도...!?
이러한 생각들을 하니 정말 만날 인연이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또한 이러한 인연에 대한 생각은 이날 언니들과 저녁을 먹으면서도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보통의 순례자들은 수비리 다음으로 팜플로냐에서 묵는다. 프랑스 길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대도시이기에 다시 재정비를 하고 편히 쉬어갈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팜플로냐가 아닌 다음 마을 시즈루 메노르까지 가기로 결정하였다. 시즈루 메노르에서 묵고 싶었던 숙소도 있었고, 아직 컨디션이 괜찮을 때 최대한 더 걷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일은 나의 첫 동행이었던 언니들과 헤어지는 날이었다. 세계여행을 해 시간이 여유로운 언니들과 달리 나는 일정이 정해져 있었기에 언젠가는 헤어질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그 시간이 조금 빠르게 온 것이다.
언니들과 함께하는 마지막 밤, 마침 오늘은 J언니의 생일이라 기념으로 알베르게가 아닌 에어비엔비를 빌렸고 함께 맛있는 것을 먹기로 하였다. 그렇게 먼 곳에서 생일을 맞이한 언니를 축하해주며 이렇게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일정이 다름에 무척 속상해했다. 정말 많이 속상했다. 누군가와의 헤어짐에 그렇게 슬퍼하지 않는 성격인데, 만나면 헤어짐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며 인간관계에 대해 조금은 쿨했던 나인데. 언니들과의 헤어짐은 어찌나 속상하던지. 심지어 생각해보니 언니들을 만난 것이 3일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정말 놀라웠다. 서로 너무 잘 맞아서 그랬는지, 아니면 만난 곳이 이 길이어서 그랬는지..
지금 생각하면, 이런 것 또한 산티아고 순례길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함께한 사람들과 급속도로 친해지고 서로 애틋해지는 길. 동료애가 자연스럽게 생기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