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을 깨워준 피레네 산맥

2019년 4월 2일 Day 1, 생장에서 론세스바예스까지 24.8km

by YEON
동이 트던 생장의 아침

산티아고 순례길에서의 첫날이 밝았다.


오늘은 순례길에서 가장 악명이 높은, 피레네 산맥을 넘는 날이기에 배낭은 미리 동키로 보내 놓고 아침 일찍 출발하였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아침, 동이 트고 있는 생장을 지나 피레네로 향했다. 나폴레옹 루트라고 쓰여있는 표지판을 따라 걸으며 새삼 이 곳을 지날 수 있음에 감사하며 출발! 걷다 보니 배낭을 메고 걷는 순례자들이 많이 보여 '아, 나도 동키를 하지 말걸 그랬나?'싶었지만 동키는 정말이지 탁월한 선택이었다. (피레네에서는 꼭 동키 하세요, 여러분!)

가벼운 발걸음에 너무나 신이 났고, 멋진 풍경에 너무나 행복했다. 날씨도 해가 나지 않아서 좋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안개가 껴서 분위기 있고 오히려 덥지 않아 걷기에는 더 좋았다.

동이 트던 피레네 산맥은 얼마나 아름답던지,

그 고즈넉한 분위기와 조용함에 너무나 행복해졌다. 꼭 조용한 시골 마을에 산책을 하러 온 기분이랄까.

또한 악명이 높은 코스라고 너무나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걱정을 많이 하고 출발했는데, 우리나라의 험한 산들을 등산해 본 경험으로 피레네 산맥 코스는 그저 둘레길을 걷는 정도의 힘듦이었다. 그래서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라는 생각은... 정확히 오리손을 지난 후 취소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ㅋㅋㅋㅋㅋ


악명이 높았던 만큼 피레네 산맥은 역시 힘들었다. 처음 몇 시간은 괜찮았다. 하지만 거의 7-8시간, 25km가 되는 거리를 계속 오르막과 내리막으로 반복하다 보니, 급경사가 아님에도 점점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상할 정도로 신이 나고 재밌었다.


힘든데 즐거운 기분.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이었다.

사실 30대가 되고, 한 가지 직업을 계속하게 되면서 '열정'이라는 것이 사라졌었다. 늘 똑같은 일상, 그 일상에서 그저 조금 더 편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현실.

예전에는 편하게 할 수 있는 것도 다른 방법으로 도전해보고 야근을 하면서도 더 나은 성과를 위해, 나의 커리어를 위해 열정적으로 일할 때가 있었는데, 피곤하면서도 즐겁고 보람을 느끼던 때가 있었는데 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열정을 잊은 지 오래되었다. 근데 피레네 산맥을 걸으며 힘든데 즐겁고 보람 있는 이상한 기분을 오랜만에 느끼게 되었고, 옛날의 열정 있던 나의 모습에 대해서도 많이 회상하게 되었다.

많은 생각을 하며 걷게 된 순례길의 첫날.

예전의 열정 있던 나의 모습을 다시 찾은 느낌에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처음으로 순례길에서 사 먹은 오렌지 주스와 또르띠야는 너무 맛있었고, 눈 덮인 피레네 산맥은 너무 아름다웠다. 아무 데나 철퍼덕 앉아 양말을 벗고 쉬는 것도 너무 좋았고, 앞 뒤로 아무도 없는 길에서는 혼자 신나게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것도 재밌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다리는 점점 아파왔지만, '힘든데 즐거운 경험'을 오랜만에 할 수 있어 행복했다!

프랑스 길의 첫 코스가 피레네 산맥인 것은 정말 신의 한수인 것 같다. 아마 첫날이기 때문에 모두 피레네 산맥을 넘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처음이라는 설렘과 한 번 해보자는 자신감에 넘을 수 있는 곳. 그리고 그렇게 넘게 된 피레네 산맥으로 인해 앞으로의 700km 또한 무사히 걸을 수 있을 테니까. "내가 피레네도 넘었는데, 이 정도를 못 걷겠어?!" 하는? :-) 만약 어느 정도 몸과 마음이 지친 중반부에 피레네를 만났다면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아니 포기하기도 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론세스바예스 도착!

생각보다 내리막길에서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지만 무사히 알베르게에 도착해 오자마자 씻고 빨래하고 편히 쉴 수 있었다. 아주 공개적이고 프라이빗한(?) 론세스바예스의 알베르게ㅋㅋㅋㅋ 100명이 한 층에서 함께 자는 구조이지만, 독서실처럼 4명씩 침대로 나뉘어 있어서 4인 1실 같은 느낌이었다. 너무나 많은 인원이 한 곳에서 자야 하는 상황에 당황스러웠지만 시설도 서비스도 무척 좋았던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 아주 감사하고 편하게 사용하였다.


뒤늦게 온 언니들과 다시 만나 알베르게에서 주는 저녁을 함께 먹고 다른 순례자들과도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들어왔다.

제일 힘든 코스라는 피레네 산맥을 무사히 넘었다는 안도감, 나름 할만하다는 생각, 나의 가슴속에 조금씩 피어나는 열정을 느끼며 무척 행복했다. 첫 스타트를 잘 끊어낸 것 같아서. 앞으로가 더 기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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