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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 Oct 19. 2020

비행기에서 독서해본 적 있으세요?

[비행독서] 핸드폰은 비행모드, 우리는 독서모드

아침에 눈을 떠 잠이 들 때까지 손에서 거의 떨어지지 않는 핸드폰.

바쁜 알람에 반가운 소식부터 소소한 즐거움까지.

심지어 업무와 관련된 것도 핸드폰으로 해결하다 보니 핸드폰은 더욱더 손에서 떨어질 일이 없다. 아니, 손에 떨어질 때에도 핸드폰은 항상 곁에 붙어있다.



그날도 역시나 핸드폰으로 의미 없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유튜브, SNS, 검색창, 사진첩 등등. 그렇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자주 들어가는 남의 집 홈페이지에 들어갔는데 한 프로젝트가 눈에 들어왔다.

"비행독서"

언젠가 비행기에서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내가 즐겨있는 분야의 책이 아니었는데 꼭 읽어야만 했고 기한까지 정해져 있었다. 몇 번을 들춰봤지만 읽히지 않아 미루고 미뤘는데 하필 여행 일정과 겹쳐버려 결국 그 무거운 책을 가방에 넣고 비행기에 올랐다. 이코노미 석, 그것도 중간자리.. 옴짝달싹 못하던 좁은 곳에서 나는 읽어야만 하는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비행기의 웅웅 거림, 가끔 흔들리던 기내, 옆사람의 코 고는 소리, 가끔 들리는 승무원의 조심스러운 발걸음, 나만을 비추던 작은 불빛,

나름 책을 좋아하고 즐겨 있는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집중해서 책을 읽었던 적이 오랜만이었다. 무척 딱딱하고 내가 좋아하는 분야의 책이 아니었기에 나와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그 책은 의외로 재미있었고 지루했던 장거리 비행을 즐겁게 만들어주었다. 온전히 책에 집중한 기분, 아주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그 후 나의 책 편식도 조금은 고칠 수 있었다.



최근 책에 집중을 잘하지 못했다.

책을 읽으려 폈다가도 알람 소리에 한동안, 갑자기 스쳐 지나간 생각을 핸드폰 노트에 정리하다 또 한동안, 그냥 집중이 안되어서 한동안, 그렇게 한동안 한동안 핸드폰을 손에 잡기 일수였다. 자극적인 핸드폰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인지 소담스러운 책의 매력에 소홀해졌던 것인지, 결국 마무리는 책을 덮어버리는 것으로 끝났다. 덕분에 읽고 싶은 책은 책상에 쌓여가고 언젠가, 언젠가 하며 미루던 차였다.


그런 내게, '책과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은 여러분 여기로 오세요. 3시간 동안 스마트폰은 비행모드로 잠들게 하고,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온전히 즐기자고요.'라는 문구는 비행기에서의 즐거웠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비행독서 프로젝트에 신청서를 내게 만들었다.


비행독서는 일요일 오전 10시 반에 진행되었다.

주말의 늦잠을 뿌리치고 나선 익선동의 아침은 낯설 만큼 조용했고, 고요했다. 지도를 보며 이 즈음인데, 하며 다다라서도 보이지 않던 공간은 조금 고개를 돌리자 마법처럼 코너에 짠 하고 나타났다.


나의 주말 아침을 책으로 채워줄 공간, 숙녀 미용실.


외관에서 뿜어내는 아기자기함이 늦잠을 자지 못해 피곤했던 눈을 설레게 만들었다. 오늘은 어떤 경험을 하게 될까, 기대하며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이미 먼저 오신 분들은 자리를 잡고 책을 읽고 계셨다. 그동안 경험했던 남의 집은 만나면 서로 소개를 하고 분위기를 풀어가며 이야기를 하고 체험을 하곤 했는데 이번 남의 집은 일단 앉아서 책을 읽으란다. 물론 핸드폰은 비행모드로 바꾼 뒤에! 아주 색달랐다. 정말 비행기에 탄 기분이었다랄까 :) 낯선 여행지로 떠나며 내 옆에는 어떤 낯선 이가 앉을까, 궁금해하던 때처럼.


자리를 잡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늑하고 따뜻한 느낌. 하나하나 호스트님의 손길이 담겨있는 것 같아 앉아만 있어도 행복해지는 느낌이었다.

아, 나 책 읽으러 왔지. 

잠시 자리를 정리한 뒤 책을 꺼냈다.


'만나지 않은 것보다 만난 것이 더 좋았다.'


여행병이 도지거나 새로운 여행을 다녀온 뒤에 꼭 다시 읽는 여행 산문집인데, 늘 읽을 때마다 받게 되는 느낌과 생각들이 달라져 참 좋아하던 책이었다. 언젠가 여행 가방에 챙겨 비행기 안에서 읽고 싶었던 책이었는데 코로나로 인해 여행이 힘들어지고 그저 책장에 꽂혀있던 책을, 이 기회를 통해 다시 읽고 싶어져 가져왔다.

나만을 위한 딱 한 자리, 낯선 듯 설레는 공간, 책에 잠겨가는 목을 적셔 줄 음료, 적당히 시끄러운 소음(공간 바로 옆 도로를 공사 중이었는데 오히려 그 공사 소리가 비행기 소음과 비슷해 더 주제와 맞았던 것 같다. 호스트 님은 미안해하셨지만..), 그리고 먹통이 되어버린 핸드폰.


전혀 달랐지만 어쩐지 비행기에서 독서하는 기분이었다. 그때의 기분, 그때의 감정, 그때의 느낌과 같았으니까.



마음가짐의 문제였을까, 정말 비행기 모드로 돌려버린 핸드폰 덕분이었을까, 공간의 힘이었을까

오랜만에 집중해 온 마음으로 느낀 책은 여전히 좋았고 오랜만에 책 읽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 주었다.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90분.


조금의 휴식시간을 갖고 우리는 각자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서로 생각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책과 비행기, 여행이라는 공통점들이 있어서인지 서로 전혀 다른 내용의 책들을 가지고 왔음에도 어딘지 모르게 같은 이야기를 하는 느낌. 이야기는 이어졌고 공감됐다. 하나의 책을 의무적으로 읽고 토론하던 독서모임이 아닌 내가 읽은 책, 다 읽지 못해도 읽은 만큼 느낀 것들, 그것에 대한 생각들, 그에 따른 경험들, 공감되는 이야기들은 무척 편안하고 공간만큼 따뜻하게 다가왔다.


잠시지만 온전히 책과 함께일 수 있던 시간, 누군가와의 관계를 잠시 끊고 오롯이 혼자 책 속으로 빠질 수 있었던 비행독서.

덕분에 다시금 책을 사랑하고 즐겼던 때로 돌아갈 수 있을 듯하다.

그리고 가끔은 핸드폰을 끄고 비행독서를 실천해보려 한다.






https://vo.la/mijoP


'이 콘텐츠는 남의 집 서포터즈 거실 여행자로 지원받아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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