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비행기를 탔던 순간, 이 세상에 오롯이 나 혼자만인 것 같던 순간, 너무 덥고 힘든데도 웃음만 나던 순간, 즐거우면서도 나는 왜 여기 있는지 물음표 가득했던 순간, 누군가와 함께해서 행복했던 순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났던 순간, 나의 결심을 다잡게 해 주었던 순간...
수많은 순간들이 있지만, 그중 가장 잊지 못하는 순간을 뽑으라면 나는 늘 베키오 다리에서의 일출을 뽑는다.
나의 첫 유럽 여행 중 혼자 본 일출.
단순히 아름다웠기에 잊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도 없던 베키오 다리의 어색함과 일출의 황홀함이 주는 모순된 느낌, 거기에 혼자 용기를 내었다는 첫걸음. 멍하니 바라보던 그곳에서 했던 생각들, 다짐들, 떠오른 누군가, 알 수 없던 눈물까지. 그 이후 나의 삶에 딱 정답을 내준 것은 아니지만 조금 더 밝고 도전적일 수 있도록 영향을 준 순간이었으니까.
그 이후 많은 곳들을 여행 다녔고 수많은 잊지 못할 순간들이 생겨났지만 여행 이야기를 하거나 수많은 여행 이야기 중 하나를 꼽아야 할 때 늘 빠지지 않는 순간이 베키오 다리에서의 일출이었다.
그 순간을 잊지 못해, 사진을 인화해 방 안에도 붙여놓고 어반 스케치 수업에서도 베키오 다리 일출을 배경으로 그림도 그렸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순간을 기억하고 싶었고, 점점 지나는 시간에 나의 기억이 희미해지는 것이 속상해졌다.
그러던 나에게 또 한 번 그 순간을 기억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이번에는 향기로.
어떤 특정 냄새를 맡았을 때, 그 냄새로 인해 관련된 기억이 떠오른다고 한다. 향이 이끌어내는 기억은 경험에 기반하니까.
그래서 남의집에서 [향기로 기록하는 나의 유럽 여행] 프로젝트를 보았을 때 나는 앞뒤 가리지 않고 신청했다. '유럽', '여행 이야기', '잊지 못하는 순간', '향기로 기억하기'. 이 단어들을 보자마자 나는 베키오 다리에서의 일출이 떠올랐고, 조금은 흐릿해지던 그 순간을 향기로 남길 수 있겠구나 싶었다.
도착한 향수 공방의 한쪽 벽면은 추억이 깃든 유럽 여행지 사진으로 가득했고 기분 좋은 향기가 났다.
함께 할 사람들이 모이고, 먼저 향수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에 대해 호스트님께서 설명을 해주셨다. 향수의 구조(향수는 Top, Middle, Last로 지속성과 발향성이 나뉜다고 한다.), 지속성과 발향성에 따른 향수의 구분, 향을 나누는 기준 등등. 간단하고 쉽게 설명해 주셔서 향수에 대해 전혀 지식이 없던 나도 재밌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나의 추억이 깃든 순간을 표현하는 시간.
아무도 없던 고요함, 새벽 공기의 차가움과 상쾌함,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 주황빛 하늘, 점점 밝아오고 따뜻해지던 기분, 나에 대한 벅참까지.
나는 잊지 못하던 순간이 일출의 순간이기에 새벽의 차가움에서 일출의 따뜻함까지 표현하고 싶어 고민했다.
너무나 다른 결의 향이기에 고민하던 내게 호스트님은 걱정 말고 자신이 원하는 향을 섞어보라고 응원해주셨고 나는 나의 추억의 향을 찾기 시작했다.
시작된 시향의 시간. Top, Middle, Last note에서 각각 세 가지 정도의 향을 맡아볼 수 있었다.(한꺼번에 많은 향을 맡게 되어 혹여 헷갈리거나 냄새가 섞이지 않을까 걱정되었는데 중간중간 원두의 향을 맡으며 향을 구분하였고 하나하나 느낀 점들을 적어보니 더 신나고 집중되었다.)
시향의 시간이 끝나고, 나는 Top note에서 Sage라는 그린 계열의 향을, Middle note에서는 수선화, Last note에서는 머스크 향을 골랐다. 세이지에서는 꼭 새벽의 시원함이 느껴졌고, 수선화에서는 해가 점차 올라오며 붉은빛으로 물들 때의 느낌 같은 시원하면서 달콤한 향이, 머스크는 시원하면서도 묵직한 그때의 감정이 느껴지는 향이었기에. (꼭 각 노트마다 한 가지씩 고르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나는 우연히 원하는 향들이 하나씩 들어있었을 뿐 :)
원하는 세 가지의 향을 고른 뒤 기대가 되었다.
정말 나의 추억의 향이 나올 수 있을까?
향수를 만들 때에는 향료와 알코올을 섞기 때문에 일주일 정도의 숙성 시간을 가져야 한단다. 나의 추억의 향기는 일주일 뒤에 만날 수 있다.
이제 스스로 각 향의 비율을 정하고 향료를 섞는 시간. 비율에 맞게 그램수를 정하고 저울에 올려 정확하게 숫자를 맞췄다. 손이 떨려왔다. 숫자를 맞추기 위한 정확도의 떨림이었는지, 나의 향을 만든다는 설렘이었는지.
그렇게 나만의 향수가 완성되었고 이름도 붙여주었다. '베키오 다리에서'
일주일이 지난 지금, 나는 나의 향수를 처음 뿌려보았다.
새벽의 공기처럼 시원한 첫 향에서 점점 밝아오던 일출처럼 달콤하고 따뜻해지던 향. 꼭 베키오 다리, 피렌체의 우아함까지 담아 둔 향이 느껴져 다리 위에 서있던 내가 생각났다.
향기로 무언가를 기억한다는 것. 나의 추억을 향기로 담아놓는다는 것.
어렵고 향수에 대해 모르던 나에게는 더 먼 이야기였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새로운 추억 방법을 찾은 것 같아 즐거웠다.
평일 저녁에 열렸던 남의집. 평소 평일 프로젝트는 저질 체력으로 인해 잘 참여하지 않던 나였기에 참여하기 전
신청을 하고 나서 조금 후회를 했는데, 그 후회가 후회될 만큼 너무나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