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20-190423 레온에서 ( 부제 : 이런 순례자도 있습니다!)
어제 이른 오후부터 푹 쉬어서 그런지, 아침에 일어나니 몸이 한결 가뿐했다. 부지런히 체크아웃을 하고 숙소에서 얼굴만 빼꼼하면 보이는 바로 옆 대성당에서 사진도 한 번 찍어주고, J를 만나러 갔다.
어제 저녁을 함께 먹기로 한 J와는 만나지 못했다. 나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아팠고, J 또한 레온에 도착해서부터 고열과 오한으로 밤새 고생했기 때문이다. 서로 약에 취해 자느라 연락조차 이어지지 않았을 정도였으니. 오늘 우리가 예약한 숙소는 J가 머물고 있는 곳 근처라 내가 J가 있는 곳으로 가서 만난 후, 숙소로 함께 가기로 했다.
하루 만에 다시 만난 J는 의학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내가 보아도 '큰일 났다.'싶었다. 온몸이 부어있었고 절대로 걸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 빨리 병원에 가야 했지만 하필 부활절 주간으로 모든 병원이 쉬는 상황이었다. 문의를 한 숙소 리셉션에서도 월요일이 되어야 병원에 갈 수 있을 거라고 한 상황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J를 데리고 숙소로 향했다. 그래도 지금 가는 숙소에서는 한국말이 통하니 조금은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산티아고를 계획할 때에 제일 고민하던 부분이 '부활절' 당일의 숙소였다. 나의 예상 루트 상, 부활절 당일 레온에서 머물게 되기 때문이었다. 산티아고를 많이 다녀오신 분께 여쭤보니, 이왕이면 예약을 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조언을 해 주셨다. 다른 마을에서 자도 괜찮다면 상관없지만, 레온에서 부활절을 보내고 싶다면 레온에 숙소를 미리 예약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아마 사람이 많아 예약이 힘들 거라고.
그래서 레온의 숙소를 찾다 보니, 한인민박이 있었다! 순례길 중 유일한 한인민박. 저녁에는 한식까지 나오는! 20일 즈음이면.. 한식도 그립고 한인민박에서 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 푹 쉬자는 취지로 2박이나 예약했던 한인민박이었는데 일행들도 나의 추천으로 함께 한인민박에서 묵기로 했던 것이다.
10분 거리를 거의 30분 만에 도착한 우리들. 우리를 보자마자 민박집 사장님께서 하신 말씀은 "어디가 아프냐"였다. 영어도 잘 통하지 않는 순례길에서 정말 급한 일이 생기거나 아파서 병원에 가야 할 때에 한국인 순례자들이 이 민박에 많이 온다고 한다. 하긴 나도 까미노 카페에서 아프신 분이 여기에서 도움을 받았다는 글을 보고 이곳을 알게 되었으니까. 나는 푹 쉬면 나아질 병이었기에 괜찮았지만, 민박집 사장님은 J의 상처를 보시자마자 "응급실에 가자"라고 바로 말씀하셨다. 아, 응급실! 그렇지, 아무리 휴일이어도 응급실은 하겠구나. 정말 다행이었다. 월요일까지 기다리다 병원에 갔으면 큰일 났을 텐데 말이다.
J를 병원에 보내고 숙소에 몸을 뉘었다. 레온의 한인민박은 가정집 느낌이라 꼭 할머니 댁에 놀러 온 기분이었다. 조용했다. 지금은 순례자가 아닌 기분.
기분 좋은 평온함에 깜빡 잠이 들었다가 깨니 병원에 갔던 J가 도착해 있었다. 발에 붕대를 칭칭 감고서는... 병원에서 만난 스페인 의사는 J의 발 상태를 보고 한마디 했다고 한다. 'You are crazy.'라고. 이 발을 가지고 순례길을 걸은 거냐며, 하하. 의료 관련 지식이 없던 우리 일행들이 그저 물집인가 보다, 하고 넘기고 방치했던 것은 봉와직염이었다. 심지어 염증을 그냥 놔둔 탓에 곪아서 죽은 살까지 도려냈다고... 정말 이 정도인 게 다행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한인민박에서 쉬게 되었다. 한인민박에는 우리처럼 아프신 분들도 계셨고, 한식이 그리워서 오신 분들, 그리고 레온에서 순례길을 시작하시는 분들도 계셨는데. 아프지 않았던 분들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레온의 한인민박은 흡사 병동 같았다고 한다.ㅋㅋㅋㅋ 본인들이 침대를 차지하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미안함까지 있었다고... 그래도 너무나 좋은 사람들과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고, 또한 저녁마다 제육볶음과 된장찌개, 김치찌개 등 너무 맛있고 감동적인 메뉴들이 나와 나의 몸 상태와는 별개로 너무 행복했다!
J는 스페인어가 통하는 사장님 부부와 매일 병원을 가야 했기에, 염증이 나을 때까지 기약 없이 레온에서 쉬게 되었다. (결국 J는 산티아고를 완주하지 못했다. 레온에서 치료를 위해 거의 2주 동안 머물러야 했기 때문이다. 사리아-산티아고 구간을 걷지 못했기에, 500km 이상을 걸었음에도 완주증도 받지 못했다. 그래도 이후 포르투갈 여행을 함께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감기몸살에 배탈까지. 모든 면역력이 떨어져 있던 나도 최대한 일정을 줄이기로 했다. 힘들다던 폰페라다 - 사리아 구간을 점프하기로 결정했고 레온에서 4일의 휴식 시간을 갖게 되었다. 나의 목표는 최대한 컨디션을 회복하는 것. 그저 푹 쉬는 것이었다.
그렇게 쉬게 된 레온은 참 좋았다. 시내는 부활절 축제로 들썩들썩해 관광지를 온 느낌이었고 숙소가 있던 곳은 중심가와 떨어져 있어 조용하고 편한 분위기였다. 맛있는 음식도 먹고, 늘어지게 침대에 누워있기도 하고, 컨디션이 괜찮으면 노래를 들으며 산책도 하면서 점점 회복해갔다.
그러면서 다른 일행들과도 모두 헤어지게 되었다. 함께 한인민박에서 묵었던 H는 우리와 계속 일정을 함께하고 싶어 했지만, 우리가 아프다는 이유만으로 멀쩡한 H가 레온에 무기한 함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가지 않으려는 것을 등 떠밀어 보냈다. (워낙 정이 많아서 헤어질 때 참 힘들어했다. 그래도 이후 좋은 분들을 만나 끝까지 완주한 기특한 H!) Y님도 컨디션 조절 차 레온에서 2박을 하신 후, 이후의 순례길을 위해 출발하셨다. 중간에 헤어졌다가 한인민박에서 다시 만난 S언니도 하루만 쉰 후 출발했기에.. 그렇게 모두와 헤어지게 되었다.
일행들과도 헤어지고 한 번의 점프를 더 해야 하지만, 괜찮았다! 그저 앞으로의 일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기를. 더 아프지 않기를 바랄 뿐! 그리고 레온에서 며칠 쉬어 본 느낌으로는...
이렇게 레온에서 스페인 주민처럼 살아보는 것도 해볼 만하잖아?
또 이렇게 내가 순례길에서 있었던 일들을 글로 쓰게 된 이유는 이때의 이야기가 컸다. 무조건 순례길을 걸어서 완주할 필요 없다고. 각자의 상황에 따라 완주하는 방법이 다른 것이라고. 나 같은 사람도 있다는 것을 이 길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쉬어도 괜찮다고,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23일. 드디어 레온을 떠나는 날, 다시 까미노를 시작하기 위해 아스토르가로 이동했다. (한인민박에서 저녁마다 나오는 맛있는 한식을 급하게 먹다가 3일째에 급체하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또 하루 쉬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J와도 헤어지는 날이다. 걷지도 못하고 침대에만 있는 J. 심한 염증으로 비행기조차 탈 수 없는 상황이라 한국에도 갈 수 없고 레온에서 쉬고 있는 J를 위해 군것질 거리와 편한 신발도 사다 주었다. 조금은 편하게 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계속 함께 할 수 없어서 미안한 마음에... 아마 같이 아팠고 힘든 순간을 함께 보냈기에 더 애틋했던 것 같다. 그래도 순례길 이후 포르투갈 여행 일정이 겹치기에 그때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하며 작별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버스터미널에서 조금 앉아있다 보니 아스토르가로 향하는 버스가 왔다. 자세히 보니, 아스토르가는 중간 경유지였고 최종 목적지는 산티아고. 이 버스에서 내리지 않으면 산티아고에 갈 수 있겠구나...?ㅋㅋ 하며 자리에 앉았다. 의외로 버스에는 순례자들이 많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도착한 아스토르가는 가우디의 건물이 맞이해주고 있었다. 워낙 가우디를 좋아했던 나는 숙소 체크인 전까지 가우디의 건물을 구경했다. 아직은 순례자보다는 관광객의 기분이었다.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다시 물품을 재정비했다. 레온에 머무는 동안 배낭 '안' 쪽에 넣어두었던 팔토시와 스틱, 모자를 꺼내고 다시 일정을 되짚었다.
그리고... 모두와 헤어지고 이제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며칠 전 레온에서 헤어졌던 Y님이 오늘 아스토르가에 도착하신다는 것이다! 이런 우연이..! 그렇게 Y님과 다시 만나 저녁 식사를 하고 내일 다시 함께 걷기로 하고 헤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