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18 Day17. 모라티노스 - 리얼 까미노 20km
어제의 일을 교훈 삼아 오늘은 미리 숙소를 예약하고 출발했다. 특히 이번 주는 부활절 기간으로 이때에만 순례길을 걷는 순례자들도 많은 상황이라 어제와 같은 불상사를 막기 위해 더욱더 예약이 필수였다.
갈 곳이 정해져 있다는 생각에 한결 마음은 편해졌지만 몸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원래도 몸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 난방이 잘 되지 않던 모라티노스 알베르게에서 하룻밤 지내 바로 감기몸살에 걸렸고, 컨디션이 최악의 상태로 길을 걷게 되었다. 우리 일행 모두 속도가 나지 않았다. 나는 감기몸살에 J는 물집에, 다른 일행들은 우리를 걱정하다가... (J는 우리 일행 중에서 제일 잘 걷는 친구였는데, 며칠 전부터 엄지발가락 위에 물집 비슷한 것이 생기고 나서는 아파서 잘 못 걷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겨우 사하군에 도착하니 큰 약국이 있어서 J는 물집 방지 패치를 샀고, 나는 진통제를 샀다.
무조건 내일은 레온으로 점프를 하겠다는 굳은 의지로 점심을 먹고 다시 사하군을 출발했다. 감기 기운은 있었지만 물집과 발목의 상태가 조금은 괜찮았기 때문에 출발한 것이었는데, 사하군에서 출발해 5km를 넘어가는 순간부터 정신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아, 이게 기절하는 기분이구나?' 하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길을 걷다가 만난 B님. 내 상태를 보고는 왜 이러냐고 물어보셔서 그동안의 내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깨달았다. 내가 열흘 동안 매일 아침마다 진통제를 먹으며 걸어왔다는 사실을. 시간이 그렇게 흐르는지도 모르고 그저 통증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 매일 진통제를 먹었던 것이다. 게다가 매번 저녁에는 술까지 마셨으니. 미쳤다. 그러니 이렇게 몸이 바닥나지. 아니, 중간에 쓰러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눈 앞에 보이는, 당장 느끼는 고통만을 없애려다 나중의 체력을 끌어다 쓴 것이다. 정말 무지했다.
그렇게 남은 5km를 2시간이 걸려 겨우 리얼 까미노에 도착했다. 도착하고서도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어서 방에 짐도 내려놓지 못하고 1층 로비에서 레온으로 가는 차편을 알아보았다.
그런데 모두 매진이다. 내일모레가 부활절이라는 것을, 지금이 부활절 기간이라는 것을 깜빡한 것이다. 부활절로 인해 레온으로 가는 기차와 버스 모두 매진된 상황. 정말 눈물이 났다. 나는 이제 도저히 걸을 수는 없는데. 어떡하지? 그냥 여기 있어야 하나?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망연자실. 아무런 방법도 없어 그저 멍하니 알베르게 로비에 앉아있는데, 길에서 만났던 B님이 알베르게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눈 후 최선의 방법을 알려주셨다. 리얼 까미노에서 사하군으로 택시를 타고 간 뒤 (택시로 15분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사하군에서 버스를 타고 레온으로 가는 것이다. 다행히 사하군은 리얼 까미노보다 더 큰 도시라 레온으로 가는 버스가 남아있었고 그렇게 나는 레온으로 갈 수 있었다.
눈 앞의 고통만을 없애다가 결국 더 큰 고통을 얻게 된 나. 조금만 더 생각했다면, 조금만 더 내 몸을 소중히 했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와 다시 돌아간다 하더라도 너무 힘든 고통과 그래도 걸어야 한다는 현실에 또다시 진통제를 먹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들. 현실에서도 이렇게 어리석은 선택들을 해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하나 확실한 것은 이제 나의 몸을 돌봐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더 큰 고통, 아니 후회를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하루치 거리지만 일단 버스를 타고 레온에 가자. 그리고 푹 쉬자. 앞으로 어쩔 수 없이 이런 선택을 하지 않도록.
물론 나중에 또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이번 경험을 통해서 그 어리석은 선택을 하기 전에 조금은 더 깊이 생각하고 그 어리석은 선택이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