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물던 마을에서 아침을 먹을까? 하다가 다음 마을까지 3km 정도 거리라기에 그곳에서 아침을 먹기로 하고 출발하였다. 그리고 그 덕분에 오랜만에 일출을 보며 걸을 수 있었다.
... 근데 배가 고팠다... 3km가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그렇게 배고픔을 참으며 겨우 도착한 마을에는 바가 문을 열지 않았고, 결국 다음 마을까지 가서야 아침을 먹을 수 있었다. 그것도 아주 작은 바밖에 문을 열지 않아서 간단한 또르띠야와 카페 콘 레체만을 말이다.
그렇게 다시 걷기 시작. 심지어 이 날 걷는 구간은 지루한 메세타 구간이었다. 지루하게 뻗어있는 길들..
뒷모습은 신나 보이나...?
이렇게 신나 보이는 사진도 찍었지만, 쭉 뻗은 도로는 정말이지 재미없었다. 지루하고 지루한..
그렇지만 오늘은 단층 침대가 있는 수녀원 알베르게에 가는 날! 정말 거짓말하지 않고, '단층 침대'만을 생각하며 힘을 내서 지루한 길을 열심히 걸을 수 있었다. 혹시나 늦게 도착하면 자리가 없을까 싶어 더 힘을 내며 말이다.
나에게는 2층 침대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어릴 적 여동생과 함께 방을 써야 했는데, 그런 나에게 2층 침대는 유일한 나만의 공간인 느낌이었다. 2층 침대에 올라가면 1층과는 다르게 아무도 나를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참 좋았다. 후에 이사를 하고 동생과 따로 방을 쓰게 되면서 2층 침대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지만, 늘 2층 침대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여행을 가서 숙소로 도미토리를 사용하게 되어도 늘 기꺼이 2층 침대를 사용하고는 했다. 계단을 오르는 불편함보다는 아늑함이 좋았다. 나만의 공간이 좋았다. 어릴 적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아서 좋았다.
그런데 그런 나의 오랜 로망, 2층 침대 로망이 산티아고 순례길 이후 사라지게 되었다.....
그동안 내가 사용한 2층 침대들
순례길을 걸으며 나는 2층 침대를 원 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아주 강제적으로! 심지어 발이 아프고 몸이 좋지 않아 2층 침대로 올라가는 것이 너무 힘들 때에도 말이다. 까리온까지 16일 동안 11번은 2층 침대를 사용했을 정도로 나는 1층 침대 운이 좋지 않았다. (심지어 1층 침대를 사용한 것도 같이 걷던 H가 양보를 해 주어서 사용한 적이 많았다.) 순례길을 걸을 당시, 사설 알베르게를 자주 갔기 때문에 2층 침대를 많이 사용하게 된 경향도 있었다. 사설 알베르게에서는 나이 많은 어르신들에게 1층 침대를 먼저 드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젊다는 이유로 4명이 함께 가도 4명 모두 2층 침대를 배정받고는 했다... 또 무니시팔 알베르게에 묵는 날에도, 무니시팔은 순서대로 침대를 배정해줌에도 나는 매번 2층을 배정받고는 했다. 그 정도로 나는 1층 침대 운이 없었고, 순례길 동안 1층 침대 사용 비율은 30%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순례길 이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여행하는 동안에는 2층 침대가 너무 싫어 호스텔 대신 호텔을 잡거나 에어비엔비를 잡았다.ㅋㅋㅋ
까리온의 단층 알베르게
그래서 오늘 숙소였던 수녀원 알베르게는 침대가 모두 단층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정말 감동이고 사랑이었다. 힘든 메세타 구간을 단층 침대에서 잘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힘을 내서 걸을 수 있게 할 정도로 말이다!
'만약 독립을 하게 되면 1층에는 책상이 있고 2층에는 침대가 있는 가구를 사용해야지!'라고 계획을 세웠을 정도로 정말 2층 침대를 좋아하던 나였는데! 순례길을 걸으면서 그 생각이 싹 사라지다니. 아니 사라진 정도가 아니라 2층 침대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가 되었다니 :-) 그렇게 로망이라는 것이 확 바뀔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로망이란 뭘까?
로망은 상상만으로도 일상에서 힘이 되어주는 '무언가'이다. 희망적이고 추상적이지만, 일상에 힘이 되고 행복을 주는 상상! 늘 '나도 언젠가는...'을 꿈꾸면서. 그렇지만 직접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더 허황되고 꿈같은 것 같다. 직접 겪어보고 난다면 현실에 부딪혀 사라지고 마는. 그래서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수록 점점 로망이 사라지는 걸까... 현실적으로 힘든 상황에서 실컷 2층 침대를 사용하게 된 내가 2층 침대의 로망이 사라져 버린 것처럼 말이다. 힘든 상황에서 로망을 만나 된다면 그 로망이 로망이 아니게 될 수도 있나 보다. 로망은 말 그대로 '로망'이니까.
행복했던 수녀원 알베르게
그래도... 생각해보면 로망이 있기 때문에 이 힘든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로망마저 없다면, 상상하며 힘을 낼 수 있는 무언가조차 사라지는 것이니까. 현실을 겪으면서 로망이 결국은 쓸데없는 허상이었구나 하는 것을 느끼기도 하고, 그래서 나이를 먹어가며 점점 로망이 사라지지만. 그래도 로망이 있을 때가 행복했던 것 같다.
그래서 순례길을 걸으며 하나의 로망이 사라졌던 나는, 누우면 달이 보이는 까리온 알베르게 침대에 누워 또 새로운 로망을 꿈꿨다.
침대에 누워 달과 별을 마음껏 볼 수 있도록 창문 옆에 침대를 두고, 전망이 좋은 집을 사고 싶다는 로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