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나의 우상, 밥 로스 아저씨

190415 Day14. 카스트로헤리츠 - 프로미스타 25.5km

by YEON

오늘도 무난하고 평화로운 날이었다.

아.. 아니지, 조금 힘든 구간들도 있었다.

카스트로헤리츠를 나오자마자 무척 높은 언덕이 우리를 반겨주고 있었다. 최근에 평지만 걸었던 터라 오랜만의 언덕은 무척 힘들었다. 오르막길을 오를 때에 흐르던 땀은... 그래도 조금씩 조금씩 걸어서 정상에 다다르자 너무 기분이 좋아졌고, 그때부터 부스터를 단 듯 무척 빨리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걷기 시작해서도 다음 마을까지의 거리가 조금 길어서 변변치 않은 음식으로 아침을 때워야 했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내가 이 날을 무난하고 평화로운 날이라고 기억하는 것은 바로 날씨 때문이었다.


이 날, 길을 걷다가 만나게 된 풍경은 정말 예술이었다. 평소에도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던 순례길이었지만 이 날의 풍경은 그중에서도 정말 손에 꼽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림 같았던 풍경

"참 쉽죠?"

라는 유행어로 EBS에서 뚝딱, 수채화를 그리시던 밥 로스. 일명 밥 아저씨! 밥 아저씨가 생각나던 날이었다.

처음부터 미술을 전공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밥 아저씨는 20년 동안 공군에 몸을 담고 계셨다. 그런데 직급이 올라갈수록 자신의 성격과 맞지 않는 업무에 스트레스를 받던 중, 취미로 그리던 그림으로 화가의 길을 시작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바텐더 일을 하며 그릇에 그림을 그려 팔기 시작했는데, 그림을 많이 팔기 위해 빨리 그리던 것이 습관이 되었다고. 그러던 중 '빌 알렉산더'라는 독일 화가가 알라 프리마 페인팅 기법(wet om wet)으로 그림 그리는 것을 TV에서 보고 빌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고, 그것을 계기로 TV 프로그램에서 30분 이내에 그림을 완성하는 리얼타임 형식의 방송을 진행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방영된 'The Joy of painting with Bob Ross'. 한국에서는 '그림을 그립시다.'라는 제목으로 1994년도부터 EBS에서 방영되었다.


쿠션처럼 푹신할 것 같은 머리에 온화한 미소. 쓱쓱 몇 번의 붓질 만으로도 멋진 수채화를 완성하시던 밥 아저씨. 붓으로 그저 툭툭 몇 번 왔다 갔다 했을 뿐인데 나무와 숲, 바다, 산이 완성되는 모습은 어린 시절 나에게 정말 충격이었다. 밥 아저씨는 어릴 적 나의 우상이었다. 밥 아저씨 덕분에 어릴 적 많은 꿈들 중 하나가 화가였을 정도였으니. (물론 택도 없는 솜씨에 진작 때려치웠다.) 사실 아저씨를 따라서 그림을 그리다가 팔레트와 붓을 몇 번이나 망쳤는지.. 엄마한테 혼난 기억밖에 나지 않는다.

어린 시절, 나는 '그림을 그립시다.'를 놓치지 않고 꼭 본방사수를 했다. 감히 따라 할 수도 없는, 경이롭기까지 한 그림들을 멍하니 보던 기억. 심지어 밥 아저씨의 영상들을 녹화해 가지고 있었을 정도로 팬이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희미해졌던 밥 아저씨에 대한 동경은, 방 정리를 하다가 그 영상들을 보고서는 다시 생각이 났다. 어른이 된 나는, 그 파일들을 보고 스스로 의문점이 들었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밥 아저씨를 좋아했지?' 그리고 그 영상을 다시 본 뒤에 알았다. 밥 아저씨는 단순히 그림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었구나!라는 것을.


밥 아저씨는 그림을 그리는 중간중간 자신이 생각하는 것들, 인생의 철학들에 대해서 이야기하셨는데 그중에 가장 많이 하신 이야기가 있다.


We don't make mistakes. We have happy accidents.

우리는 실수를 한 게 아니에요. 단지 행복한 사고가 일어났을 뿐이죠.


이 문장을 들었던 어린 나는, 아마 '살면서 틀려도 괜찮겠구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이 프로그램을 봤을 것이다. 그리고 이 말로 인해 그때는 몰랐겠지만 어린 나이에도 알게 모르게 위안을 받지 않았을까? 괜찮다고, 걱정 말라고. 그저 고쳐나가면 되는 거라고. "여러분이 실수할 때마다 좌절하지 마세요. 제가 그린 그림처럼 이렇게 고쳐나가시면 됩니다. 참 쉽죠?" 이 말처럼.

어른이 되고 나서 보게 된 밥 아저씨의 영상은 어릴 적보다 더 나의 가슴에 와 닿았다. 멋진 그림들보다도 아저씨의 말씀들이. 그중에서도 "전 제 인생의 절반을 남을 위한 삶을 살았거든요. 그런데 그림 그리는 일은 저에게 자유를 줬죠. 그림을 그릴 때는 제가 원하는 세상을 그릴 수 있었거든요. 깨끗하고 반짝이며 빛났고 아름다웠어요. 전혀 오염되지 않은 세상이었죠. 그림을 그렸기에 제가 군대에서 20년이라는 세월을 버틸 수 있었나 봅니다."라고 이야기해 주신 적이 있었는데, 한창 힘들게 일을 하고 있던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나의 적성에 맞고 무난하게 잘해 나가고 있지만, '정말 내가 좋아하는 일일까? 나도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이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덕분에 일을 하며 틈틈이 글을 쓰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 준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It's enjoying. (인생을 즐기세요.), Take life easy. Just let it go. (인생을 느긋하게 사세요. 그저 내버려 두는 겁니다.) 등 인생을 살면서 도움이 될 이야기들을 정말 많이 해 주셨다.

밥 로스 아저씨는 항상 격려하고 용기와 위로를 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밥 로스 아저씨의 그림 그리는 영상은 그림을 그리고 싶은 사람이 아니더라도, 어른이 된 이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영상이다.


오늘은 밥 아저씨가 참 보고 싶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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