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190424 Day23. 아스토르가 - 라바날 델 까미노 20.3km

by YEON

5일 만에 다시 시작하는 까미노.

돌아온 순례자를 환영이라도 하 듯 눈이 내렸다. 아주 펑펑. 4월 말에 눈이라니.. 당황스러웠지만 기분은 좋았다. 특히 걷기 힘들 정도로 내리는 것이 아니라, 솜사탕처럼 예쁘게 내리는 눈에 더 기분이 좋아졌다.

예쁘게 내리던 눈

오랜만의 까미노는 조금 어색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쉰 것도 아닌데 말이다.

등산화도 답답한 느낌이었고, 오랜만에 잡은 스틱은 걸을 때마다 걸리적거렸다. 배낭의 무게도 더 무거워진 듯했다. 그렇지만 제일 어색했던 것은 내 다리. 걸은 지 30분 정도 지나자,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순례길에 적응해 움직이고 있는 내 다리가 가장 어색했다. 그리고 점점 실감이 났다.

'아, 내가 다시 돌아왔구나!' 기분이 너무나 좋았다. 이렇게 다시 걸을 수 있음에.
아마 날씨도 한몫을 차지한 것 같다. 만약 해가 쨍쨍해 더웠거나 우박처럼 눈이 심하게 왔다면 첫날부터 너무 힘들어서 다시 걷게 된 것에 대해서 이렇게 기분이 좋았을까 싶으니까. 그렇지만 나를 환영해주는 듯한 소복소복 내리는 눈은 나를 더 행복하게 만들었다.

아침에 함께 출발하기로 한 Y님과는 시간이 맞지 않아서, 길에서 만나자! 하고 출발했던 상황.

한 10km 걸었나, 작은 마을과 바가 나와서 쉴까 더 걸을까 고민하고 있던 차에 저 멀리서 Y님이 반갑게 손을 흔들고 계셨다.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처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함께 바에서 쉬었다. 바에서는 반가운 얼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오리온에서 함께 비빔밥을 먹었던 한국인 어머님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동안 내가 아팠다는 소식을 들으셨는지, 건강하게 걷고 있는 나를 보고 기특해하시고 나보다 더 좋아해 주셔서 너무나 감사했다.


오랜만이라 그런가 페이스가 참 좋았다. (그렇지만 무리하지 않는다!)

길도 너무 예뻤다. 그동안에는 숲길, 찻길, 메세타 구간, 마을 등등 비슷한 길들이었는데. 오늘 걷게 된 숲길은 오묘한 느낌이었달까? 나뭇잎이 없는 앙상한 나무들 사이에 철조망, 그리고 그곳에 꽂혀있던 나무 십자가들. 꼭 헨젤과 그레텔이 마녀의 집으로 가던 숲길의 느낌이었다. 그 분위기가 너무나 멋있어서 힘든 것도 모르고 분위기에 취해 걸었는데, 사진에는 그 느낌이 나오지 않아서 너무 아쉬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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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젤과 그레텔이 이 길을 걸었을까...?

그렇게 도착한 라바날 델 까미노. 이 마을의 성당에는 한국인 신부님이 계셔서 숙소에서도 한국어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숙소도 너무 예쁘고 아기자기했다. 그리고 가장 좋았던 것은... 침대 선착순!!! 레온에서 너무 편하게 쉬고 온지라 2층 침대가 더.. 싫어졌었는데ㅋㅋ 또한 침대가 너무 붙어있어서 모르는 사람과 옆 침대를 쓰면 너무 민망하겠다.. 하던 터였는데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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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바날 델 까미노의 알베르게

씻고 누워서 쉬다가 오늘 걸으며 주웠던 돌에 소원을 적었다. 내일은 철의 십자가에 가는 날이니까. 한국에서부터 돌을 가져오지는 못했지만, 돌에 소원을 쓰기 위해 한국에서부터 챙겨 온 나의 네임펜이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 나의 소원... 그저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이 행복하고 건강하기를, 그리고 나도.


소원을 적고 센치해져 비로 바뀐 진눈깨비를 구경하고 있는데, 아까 만났던 한국인 어머님들이 부르셨다. 밥 했다고 밥 먹자고! 한국인은 밥심으로 걷는 거라며, 이제 다시 아프지 말라며 주신 흰쌀밥. 마트가 없어 다른 반찬도 없었고 토마토소스와 김이 전부였던 밥이었지만 너무 맛있었다. 제대로 만든 한식보다 더. 이렇게 감사한 도움과 사랑을 받고, 너무나 좋은 분들을 만나게 되고. 다시 걷게 됨에 행복해지는 것을 보니... 아마도 내 소원이 이루어진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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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게 저녁을 먹고, '아니, 네가 여기 왜 있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게 책장에 꽂힌 '언어의 온도'에 당황하며, 오랜만에 한글로 된 책도 읽고, 디저트로 따뜻한 코코아 한 잔을 마시고 마을 산책을 했다. 다행히 비가 그쳐서 좋았다.

모든 것이 좋았다. 그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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