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25 Day24. 라바날 델 까미노 - 엘 아쎄보 17.1km
걸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위험하지 않을까, 괜찮을까,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내일 폰페라다에서 사리아 구간의 버스를 예약해 놓은 상황이었고, 그동안 많이 쉬었던 탓에 또 쉬고 싶지는 않았다. 함께 걷는 Y님도 한 번 출발해보자는 의지를 보이셔서 출발하게 되었다. 다행히 조금 여유롭게 시간을 갖고 준비를 하다 보니 출발할 때에는 눈이 그친 뒤였다. 어제 감사하고도 맛있는 저녁을 주셨던 어머님들은 무리하지 않으시고 하루 더 쉬기로 하셔서 작별인사를 나눈 후 헤어졌다.
눈이 어찌나 예쁘게 내렸는지... 철의 십자가로 향하던 길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하얀 눈과 푸른 나뭇잎들, 그리고 파란 하늘까지. 그 어우러짐이 정말 아름다웠다.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 행복해질 정도로.
나와 헤어지고 앞서 걷던 친구들의 연락이나 SNS를 통해 이 길에 대한 모습을 간접적으로 경험한 바 있었다. 그렇지만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그래서 참 재미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며칠 전에 걸었던 사람은, 며칠 후에 걸을 사람은 보지 못할 테니까. 나와 같은 곳을 보는 사람은 지금 나와 함께 길을 걷는 사람들뿐일 테니까.
그렇게 아름다운 풍경에 넋을 잃고 걷다가 철의 십자가에 도착했다.
내가 기대하던 철의 십자가는 아주 웅장하고, 누구도 쉽게 갈 수 없는 곳에 있는 아주 신비스러운 모습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내가 직접 마주친 철의 십자가는... '에이 설마, 저건 아니겠지?' 할 정도로 조그마한 언덕을 올라가자마자 그 끝이 보이기 시작했고, 심지어! 철의 십자가 바로 옆에는 아스팔트 길이 있어서 택시나 관광버스를 타고 철의 십자가를 보러 온 사람들도 많았다.
정말 기대했던 철의 십자가였기에 많이 실망했지만, 그것을 위로해준 것은 풍경이었다. 철의 십자가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어지던 눈과 자연이 주는 절경은 정말이지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어릴 적에는 '기대'를 참 많이 했었다. 어떤 일이 생길까, 누구를 만나게 될까,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어떤 생각들을 갖게 될까. 늘 무언가를 시작할 때에는 수많은 기대를 하고는 했다. 하지만 그 기대가 현실이 되는 때는 그리 많지 않았고, 점점 나이를 먹으면서 기대를 하지 않게 되었다. 그 기대가 이루어지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오히려 기대를 하다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내가 상처 받을 테니까.
아니,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기대를 하고 있지만 '기대하지 않는다고' 내 마음을 숨겼던 것 같다. 상처 받지 않으려고... 남들은 그런 나를 보며 '쿨하다'라고 이야기했지만, 살면서 무언가에 기대를 하지 않게 되는 내가 스스로 조금은 속상했었다. 점점 메말라가는 것 같아서,
그래도 '기대하지 않았던 상황'에서 마음속의 기대를 만나고 이렇게 감동하는 나를 볼 때면 생각한다. 아, 나는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 숨겨놨구나. 조금은 기대를 하고 있었구나. 그동안 너무 많은 기대로 상처를 받아 약해졌구나. 많이 위로해주어야겠구나.
그리고 어떻게 생각해보면 기대하지 않던 상황 속에서 만난 것들로 인해서 오히려 기대를 했을 때보다 더 많은 기쁨을 얻고 인생이 아름다워 보이기도 한다. 이 길에서 만난 사람들처럼, 오늘 만난 풍경처럼.
철의 십자가 이후부터는 -미친- 내리막길이 시작되었다. 돌바닥, 돌바닥... 정말 이런 돌바닥은 없었다! 특히 무릎이 좋지 않은 나는 한걸음 한걸음 조심해서 내려가느라 온 몸에 땀이 비 오듯이 쏟아졌고 진이 빠졌다. 함께 걷던 Y님은 어찌나 잘 걸으시는지... 까미노 길 옆에 차도가 있었는데, 결국 나는 차도로 걸었다ㅜㅜ
그렇게 엘 아쎄보 도착.
앞서 가던 일행들 중 이 곳의 알베르게에서 묵은 친구가 너무 좋다고 추천하여서 나는 이 곳에서 하루 묵기로 했고, Y님은 아직 더 걸을 수 있다며 출발하셨다. 이제 헤어지면 다시는 뵐 수 없을 Y님... 나의 순례길 중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했고 같은 직업으로 인생에 대한 많은 조언을 해 주셨던 감사한 분! 한국에서 꼭 뵙기로 약속하고선 헤어지게 되었다.
이 길에서 이런 인생 멘토를 만나게 될 거라고 기대하지 못했는데, 기대하지 않았던 상황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상황은 인생이 더 풍요로워지고 더욱더 행복해진다. 꼭 '네가 무언가를 할 때마다 기대하지 않는데 말이야, 그 정도로 인생이 재미없지는 않아!'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엘 아쎄보의 숙소는 추천받은 대로 정말 너무나 편하고 좋았다. 또한 레온 한인민박에서 만났던 분을 만나게 되어서 함께 저녁식사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