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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 Nov 13. 2019

비 예보가 있었다.
​우산을 챙기지 않았다.

운이 나쁘면 비를 맞는 거고.. 아니 운이 좋으면 비를 맞는 거고.

아침에 일어나 날씨를 확인하니, 오후 3시에 비가 온단다. 3시면 밖에 있을 텐데...

가만히 책장 사이에 꽂혀있는 우산을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가방을 메고 발걸음을 나섰다.


운이 나쁘면 비를 맞는 거고.. 아니 운이 좋으면 비를 맞는 거고.


비가 예보되어있던 3시가 되기 전부터 조금씩 비가 내리더니, 3시쯤이 되자 제법 굵은 빗방울들이 땅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아, 운이 좋구나 오늘은. 우산을 가지고 오지 않았냐는 동료들의 걱정 어린 이야기에 '아뇨, 저 괜찮아요!'라고 소리치고는 모자를 뒤집어쓰고 허겁지겁 밖으로 나왔다. 비가 오고 있다.


지하철역으로 가는 샛길인 근처 아파트 단지 내에 들어가니, 색색의 단풍나무 은행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 낙엽비가 내렸다. 잠깐이지만 비를 맞고 싶었는데, 나무들이 빗방울은 가져가 버리고 자신의 잎사귀들을 떨어트려 주어서 그 축축하면서도 진득한 느낌이 재미있으면서 아쉬웠다. 비를 맞고 싶었는데..

괜히 아쉬운 마음에 지하철역을 지나쳤다. 조금 더 걸어가다가 버스를 탔다. 비를 더 보고 싶어서 지하철 대신 버스를 탔다. 창문에는 비가 방울방울 맺혔다.



언제 마지막으로 비를 맞았었지..

우산을 가지고 오지 않아 피하듯 도망치듯 맞아버린 비가 아니라, 맞고 싶어서 원해서 맞았던 비 말이다.


아주 어릴 적. 뜨거운 햇볕에 빨갛게 익었던 볼이 비가 쓰다듬어 빨개질 정도로, 땀에 젖어 찐득했던 반팔티가 비가 빨래를 한 듯 시원해질 정도로, 허벅지를 타고 흐르던 빗물이 장화로 들어가 찰방찰방 물이 찰 정도로. 신나게 내리던 여름철 소낙비 아래에서 놀던 적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산성비다 황사다 하며, 절대로 비를 맞으면 안 되게 되어버렸다. 비가 오면 당연하게 우산을 들게 되었다. 비를 맞고 싶을 때마다 그저 우산을 때리는 빗소리에 위안 삼고는 했다.


성인이 되고서는..

런던에 처음 여행을 갔을 때였나 보다. 하루에도 몇 번을 오락가락하는 변덕스러운 런던의 날씨에, 비가 와도 우산을 쓰는 것은 여행객뿐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우리도 현지인처럼 비를 맞아보자!' 하며 웃으며 비를 맞았더란다. 여행지에서 뽐내려 입었던 옷이 젖어도, 앞머리가 볼품없이 내려앉아도 참 즐거웠다. 즐겁게 웃으며 즐기며 비를 맞은 것이 참 오랜만이라서 행복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서는 비를 참 많이 맞았다. 우산을 들고 길을 걸을 수는 없기에 쉽게 손이 닿을 수 있는 배낭 왼쪽 주머니에는 늘 형광색 우비가 자리하고 있었다. 비가 오는 날에도 오지 않는 날에도. 비가 오면 참 좋았다. 아니, 사실 길이 질퍽해지고 젖은 물건들을 알베르게에서 말리는 일은 곤혹스러웠지만, 비를 맞는 것은 좋았다. 우비를 통해 느껴지는 비의 느낌이 좋았다. 내 몸에 와 닿는 빗방울이 좋았다. 나를 톡톡 건드리며 안녕 인사를 하는 듯했다. 같이 놀자고 같이 걷자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그냥 재미있었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비를 맞을 수 있어서. 공기가 통하지 않아 우비 안에 습기가 차 끈적거리던 느낌도 좋았다. 기분이 나쁘면서 묘하게 그게 또 좋은 기분. 비가 적게 오면 우비를 입지 않고 배낭에 레인커버만 씌우고 비를 맞으며 걷기도 많이 했다. 그냥 좋았다. 비가 좋았다.



그러고 보면 나는 참 비를 좋아했다.

비를 보는 것도 좋았고 비를 맞으며 우산을 쓰는 것도 좋았고 바닥에 찰방찰방한 물 웅덩이도 좋았다. 습하면서 그 끈적임도 좋았다.


비가 오면 내 마음속의 작은 우울함이 씻겨가는 것 같다. 조금씩 머리를 밀고 나오는 우울함에게 빗방울이 말하는 것 같다. 나오라고, 마음껏 우울해하라고 그리고 행복해지라고. 깨끗하게 씻겨주는 것 같다. 

아마 비를 맞고 싶은 날은.. 그 우울함을 씻어내고 싶었던 날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오늘 비를 맞고 싶었다. 그래서 우산을 챙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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