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만 원짜리 전자 부적
사실, 나에게는 남들에게 말하기 부끄러운 비밀이 하나 있다.
남들이 들으면 "다 큰 남자가 무슨 겁이 그렇게 많냐"라고 비웃을지도 모른다. 잘 때 알몸으로 잔다거나, 샤워할 때 귀찮아서 중요 부위만 바디워시를 칠한다는 류의 시시콜콜한 고백은 아니다.
나는 매일 밤, 잠들기 직전 충전이 완료된 애플워치를 손목에 단단히 채운다. 보통은 자기 전에 스마트폰과 워치를 충전기에 꽂아두고 잠을 청한다. 하지만 나는 반대다. 하루 중 가장 편안해야 할 수면 시간에, 나는 비장하게 시계를 찬다. 수면 패턴 분석을 위해서? 아니다.
이유는 단 하나. 혹시나 자다가, 혹은 술 먹고 들어와서 쓰러졌을 때 이 시계가 119를 불러주길 바라서다.
고백하건대, 나는 지독한 ‘건강염려증’ 환자다. 갑자기 머리가 쿡쿡 쑤시면 검색창에 '뇌졸중 전조증상'을 쳐보고, 소화가 좀 안 된다 싶으면 '위궤양', '위암 초기 증상'을 검색하며 혼자 심각해진다. (다행히 작년 건강검진 결과는 모두 정상이었다...)
게다가 심각한 고소 공포증도 있다. 한강 다리를 도보로 건널 때나, 뻥 뚫린 더현대 서울 난간에 서면 과장 조금 보태서 공황이 올 정도로 무섭다. 고소공포증 있는 분들은 아실 거다. 내가 막 다리 밑으로 떨어지는 상상이 제멋대로 재생되고, 에스컬레이터 뒤에서 누가 나를 툭 쳐서 떨어뜨릴 것만 같은 그 예민한 공포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난 어마어마한 상상력을 가진 겁쟁이란 말이다.
어렸을 때도 겁이 많긴 했지만, 서울에서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이 예민한 기질은 생존 본능으로 진화했다. 가족과 살 땐 몰랐다. 밤에 샤워하다 미끄러져 ‘쿵’ 소리가 나도, "괜찮니?" 하고 물어봐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 급체가 와서 식은땀을 흘리며 기어서 화장실로 가 토를 할 때, 등 두드려줄 사람 하나 없다는 것. 그런 서러움 따위는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당장 내 목숨이 위태로운 실전 상황이었다.
게다가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뉴스를 보면 심심치 않게 ‘청년 고독사’ 이야기가 나온다. 발견된 지 보름이 지났다느니, 냄새 때문에 이웃이 신고했다느니 하는 기사를 읽을 때면 남의 일 같지가 않다. 나라고 예외일까? 심근경색이 나이를 봐가며 찾아오던가? 내 예민한 레이더는 항상 최악의 상황을 시뮬레이션한다.
그래서 나는 이 똑똑하고 비싼 기계에 의지하기로 했다. 내가 의식을 잃고 쓰러지면, 워치가 진동으로 나를 깨워보다가 응답이 없으면 자동으로 119에 긴급 구조 요청을 보낸다고 한다. 내 위치 정보와 함께. 기술의 발전에 눈물 나게 감사를 보내며, 나는 자기 전에 항상 비장하게 워치를 찼다.
참고로 보호자를 등록하면 위급 상황 시 문자를 보내는 기능도 있지만, 멀리 제주에 계신 부모님께 불효를 저지르고 싶진 않아서 등록하진 않았다. 이건 K-장남의 마지막 배려다.
가끔 술 한잔하고 들어온 밤, 습관처럼 애플워치를 차면서 생각한다. 혹시나 자다가 심장이 멈추면 어떡하지?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이 녀석에게 내 목숨을 맡기고 잠을 청한다. 적어도 썩은 채로 발견되어 집주인과 이웃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진 않으니까. 이건 서른셋, 겁 많은 자취생의 유난 떠는 습관이지만, 동시에 남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 마지막 자존심이기도 하다.
그런데 반전. 이 글을 쓰다가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글을 쓰면서 혹시나 해서 스마트 워치 설정 앱을 켜봤는데. [넘어짐 감지 기능 : 끔 (OFF)]
내 눈을 의심했다. 검색해 보니 이 기능, 만 55세 미만 사용자는 기본 설정이 ‘꺼짐’이란다. 나는 아직 쌩쌩한 30대라, 애플이 굳이 켜주지 않았던 거다.
더 충격적인 건 그다음이다. 나는 심정지가 오면 시계가 알아서 신고해 주는 줄 알았는데, 애플워치엔 '심정지 감지 기능' 자체가 없단다...? 그냥 심박수가 좀 빠르거나 느리면 알려줄 뿐, 심장이 멈추는 위급 상황엔 이 녀석도 그냥 먹통이 된다는 사실.
순간, 멍해졌다. "아니 뭐야. 그럼 나 지금까지 뭘 믿고 차고 잔 거야?"
나는 그동안, 아무런 보호 기능도 작동하지 않는(심지어 기능이 있지도 않은) 검은 화면을 차고, "아, 든든하다" 하며 세상모르고 잤던 것이다. 내가 화장실에서 넘어져도, 자다가 심장이 멈춰도, 이 녀석은 그저 내 손목 위에서 조용히 배터리만 축내고 있었을 거란 소리다.
나의 이 철두철미한 안전 과민증도, 설명서 한 줄 제대로 읽지 않는 ‘ADHD’ 앞에선 한낱 플라시보 효과에 불과했구나. 결국 나는 수십만 원짜리 전자 부적을 차고 잤던 셈이다.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