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명조끼를 벗다

1부. 빈 화면 앞에 선 아이

by 로그캐빈
나는 그해 처음으로 도박꾼의 얼굴을 거울에서 마주했다.


PC방에서는 리니지 전쟁이 한창이었고, IT 업계는 2004년을 달리고 있었다.

병역의 무게는 어김없이 제 나이의 청년들을 붙잡고 있었다.


DIP 연수에서 돌아온 뒤, 나는 밤마다 병역특례를 검색했다.

현역 TO의 조건, 지원 가능한 업체 목록, 합격 후기.

알아볼수록 현실의 벽만 높아졌다.


어느 날, 우편함에 낯선 봉투가 들어 있었다.

안쪽에는 날짜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입영통지서.

이제 막 코드의 재미에 빠져 있던 손에, 국가가 날짜를 찍어 보냈다.


차선책을 찾아야 했다.

OCP 자격증이 가산점이 되어, 공군 전산병에 합격 통보를 받았다.

입영 날짜를 손꼽으며 신변을 정리하고 있었다.

책상 서랍을 비우고, 서류를 한데 묶고, 내 자리에 남길 것과 가져갈 것을 갈랐다.

'그래. 군대에서도 키보드를 잡을 수 있다면 아주 나쁜 선택은 아니야.'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며 마지막 출근을 준비하던 어느 날,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한마디가, 달력 위의 입영 날짜를 흔들어 놓았다.

면접을 보러 오라는 말.

큰 기대 없이 던져두었던 이력서였다.

어차피 잃을 것도 없다는 마음으로 옷을 챙겨 입었다.


면접실 문 앞에서 잠깐 숨을 골랐다.

복도에는 오래된 사무실 특유의 먼지와 토너 냄새가 희미하게 배어 있었다.

문을 열자 종이 넘기는 소리와 의자 다리 끄는 소리가 쏟아졌다.

서류 더미 위로 몇 개의 시선이 천천히 올라왔다.

그리고 면접관 한 사람이, 나를 알아봤다.

"어? 혹시 전에… 지난번에 DIP 신입사원 연수 아니에요?"

붉은 벽돌 교정의 강당에서 내 옆자리에 앉아 병역특례의 세계를 알려주었던 그 동갑내기 친구였다.

그는 이미 그 회사에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내가 지원한 걸 보고 적극적으로 추천했다고 했다.

세상은 좁았다.


그런데 그가 내민 제안은 지독하리만큼 현실적이고 위험했다.

"지금 당장 우리 회사에 줄 수 있는 2004년도 현역 TO는 없어요. 지금부터 들어와서 성실히 일해준다면, 내년에 배정받을 TO를 우선적으로 주겠다는 게 사장님 조건입니다."

그건 보장된 미래가 아니라, 도박이었다.

내년에 회사가 TO를 받지 못하거나 약속이 틀어진다면, 나는 1년이라는 경력을 허비한 채 일반 보병으로 입대해야 했다.

만약 계획대로 공군 전산병으로 입대하면, 적어도 키보드는 놓지 않을 수 있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면접실 안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만 작게 났다.


나는 눈을 감았다.

공군 전산병으로 가면, 기지 어딘가의 사무실에서 군 전산망을 관리하게 될 것이다.

키보드는 잡을 수 있지만, 그 키보드 위에서 돌아가는 코드는 내 것이 아니다.

2년 뒤 전역하면 세상은 이미 다음 버전으로 넘어가 있을 테고, 나는 또다시 증명이 필요한 신입이다.

여기 남으면 TO가 내려온다는 보장은 없다.

1년을 버텼는데 TO가 날아가면, 나는 전산병도 아닌 일반 보병으로 끌려간다.

OCP 자격증도, 지금껏 쌓은 코드도, 전부 휘발된다.

팔걸이를 붙잡은 팔뚝에 힘이 들어갔다.


눈을 떴다.

나를 믿고 지켜봐 주시던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머니의 거친 손마디가 떠올랐다.

안전한 길 끝에 남는 건, 2년이라는 공백 뒤의 원점이었다.

"입영 연기하겠습니다. 여기서 시작하겠습니다."

말을 뱉고 나서야 등골이 서늘해졌다.

자판기 커피를 두 개 뽑아 하나를 건네던 손이, 지금 내 앞에서 나를 추천했다고 웃고 있었다.


공군 전산병이라는 안전한 구명조끼를 벗어던졌다.

2005년의 TO가 내 것이 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입영을 미루고 그 회사에 들어갔다.



-1부. <빈 화면 앞에 선 아이> 끝


여기까지가 1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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