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의 화면

1부. 빈 화면 앞에 선 아이

by 로그캐빈
실습시간, 검은 화면에 SELECT 한 줄을 쳤다.


수천 행이 밀려오던 화면은 조건 하나 앞에서 멈춰 섰다.

딱 세 줄만 남았다.

그 전까지, 내 이력서에는 늘 디자이너라는 말이 먼저 적혔다.



시작은 아르바이트였다.

그러던 일이 본사 디자이너 계약서 한 장을 거치며, 4대 보험이 찍힌 경력이 되었다.

그 한 줄 덕분에 직장인 특별전형의 문이 열렸고, 나는 야간 캠퍼스의 교문을 넘었다.


입학과 동시에 소득이 끊겼다.

점심은 천 원짜리 학식으로 버텼고, 수업 없는 낮에는 도서관에 혼자 앉아 있었다.

책상 위로 내 그림자만 또렷했다.


강의실엔 나보다 훨씬 나이 많은 만학도들이 많았다.

나는 늘 막내였고, 늘 조금 늦게 들어온 사람 같았다.

야간 수업의 속도는 생각보다 빨랐다.

칠판 글씨는 쉬는 시간이 오기도 전에 지워졌고, 질문할 틈도 길지 않았다.


그래도 커리큘럼만큼은 주간 정규수업과 같았다.

그중에서 나를 멈춰 세운 건 데이터베이스였다.

교수님이 칠판에 적은 쿼리를 따라, 나는 검은 화면에 SELECT 한 줄을 쳤다.

엔터를 누르자 수천 행의 데이터가 화면 위로 한꺼번에 밀려왔다.

순간 모니터가 물살처럼 흔들리는 것 같았다.

거기에 조건 하나를 더하자, 탁, 하고 멈췄다.

딱 세 줄이었다.

방금 전까지 소음처럼 쏟아지던 것들이, 내가 고른 답만 남기고 조용해졌다.

옆자리 누군가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내 손가락은 이미 다음 쿼리로 가 있었다.


특히 나를 더 깊이 끌어당긴 건 설계였다.

몸이 의자에서 저절로 앞으로 기울었다.

포토샵에서 레이어를 쌓던 손이, 테이블 사이의 관계를 그리고 있었다.


나는 취업까지 2년을 기다릴 수 없었다.

낮에는 OCP 자격증 교육을 병행했다.

직업교육원의 화이트보드 앞에서 낮을 보내고, 자판기 커피 한 잔으로 저녁을 넘긴 뒤, 밤에는 다시 강의실로 갔다.

같은 교정 안에서 하루가 두 번 시작되었다.


몸에 쿼리의 결이 하나씩 익어 갔다.

증명할 자리는 아직 없었다.



2003년 여름, DIP 소재의 SI 업체에서 입사 제안이 왔다.

유리문을 밀자 에어컨 냄새가 코끝을 찌르고, 프린터 소리가 천장에서 쏟아졌다.

칸막이가 가지런히 늘어서 있었고, 키보드 소리는 빗줄기처럼 떨어졌다.


이곳은 4년제 학사학위만 개발자로 채용하는 회사였다.

팀장님은 내 이력서를 훑어본 뒤 개발 업무를 맡기지 않았다.

첫 출근날 내 책상 위에 놓인 건 DB도, 로직도 아니었다.

웹사이트 디자인과 HTML 마크업.

나는 다시 픽셀을 맞추고 태그를 닫는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옆자리 선배가 JSP 파일을 열 때마다, 나는 모니터를 힐끗거렸다.

쿼리문이 화면을 채우는 걸 보면 손이 근질거렸다.

학교에서 밤마다 붙들던 그 세계가 바로 옆에서 돌아가고 있는데, 내 자리는 늘 문밖 같았다.

동아리 포스터 앞에서 발걸음을 돌렸던 날처럼, 이번에도 나는 안을 들여다보기만 하는 사람이었다.


점심시간이면 옥상 난간에 기대 섰다.

멀리 아파트 단지 사이로 열기가 아른거렸다.

다시 내려와 포토샵을 열면, 커서는 늘 같은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퇴근길 버스 손잡이를 잡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긴팔 셔츠를 꺼내 입을 무렵이 되었지만, 그동안 쌓아 올린 자격증과 야간 수업은 이 칸막이 안에서 아무 힘도 쓰지 못했다.


나는 면담을 요청했다.

"팀장님, 저는 실제 로직을 짜는 개발 업무를 하고 싶습니다. 학교에서도 데이터베이스를 전공했고, OCP도 취득했습니다. 그쪽으로 더 기여할 자신이 있습니다."

팀장님은 잠시 이력서를 내려다보셨다.

2년제 대학, 포토샵, 정보처리, OCP.

종이 위의 단어들은 아직 하나의 경력처럼 읽히지 않았다.

"... 그래? 그라면 어디 한번 해 봐라."

못 미덥다는 눈이었다.


그날부터 아주 작은 개발 일거리가 내 책상 위에 놓이기 시작했다.

대부분 화면 쪽에 가까운 일이었고, 마감도 넉넉했다.

시험이라기보다, 아무도 크게 기대하지 않는 자리에 놓인 조용한 기회였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로직을 짜 내려갔다.

디자인과 마크업을 알고 있었기에, 인터페이스와 데이터가 어디에서 맞물리는지 금방 읽혔다.

작은 기능 하나를 붙였을 뿐인데, 내가 세운 조건대로 화면의 목록이 바뀌었다.

그 순간마다 학교에서 새벽까지 보던 검은 화면이 다시 떠올랐다.


한 건, 두 건, 내 손에 들어오는 일이 달라졌다.

마감은 짧아졌고, 로직은 깊어졌다.

야간 강의실에서 혼자 그리던 ERD가, 이제는 실제 서비스의 뼈대가 되어 갔다.


반나절 만에 첫 일을 끝내고 돌아가 말했을 때였다.

"다음 일 주십시오."

팀장님이 안경 너머로 나를 잠시 바라보셨다.


소일거리는 조금씩 진짜 업무가 되었다.

"인제, 디자이너를 뽑아야겠네?"


그날부터 내 자리에서는 포토샵보다 이클립스가 더 오래 켜져 있었다.

월, 수,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