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빈 화면 앞에 선 아이 - 단축키가 예술이 되던 밤
내 손은 머리보다 빨랐다.
그 손이 처음으로 돈이 된 곳은, 대구 동성로 지하상가였다.
IMF의 그림자는 아직 거리에 남아 있었지만 대구의 번화가는 조금씩 활기를 되찾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동성로 지하상가는 디지털카메라 사진을 보정해 앨범과 굿즈로 만드는 '디지털 이미지 사진' 열풍의 최전선이었다.
친구의 권유로 그곳 본사 매장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 건 여름 무렵.
방 안에서만 키워 온 나의 '기술'이 처음으로 세상과 충돌한 순간이었다.
집에서 그 번화가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매일 아침 지하상가로 내려갈 때마다, 나는 다른 세계로 발을 들였다.
낮은 천장 아래로 인화기 열기가 내려앉아 있었다.
프린터가 종이를 빨아들이는 소리와 사람들 목소리가 벽에 부딪혀 한꺼번에 튕겨 다녔다.
매장은 늘 손님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여러 지역에 가맹점이 생겨날 정도로 사업은 빠르게 확장되고 있었다.
그 혼란스러운 현장에서 내가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그동안 마스터한 포토샵(Photoshop) 실력이었다.
실무의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밀려드는 손님들을 감당하려면 툴 아이콘을 하나하나 클릭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나는 포토샵의 툴박스를 아예 숨겨버리고, 오로지 왼손의 단축키만으로 작업을 쳐내기 시작했다.
마우스가 화면 위에서 춤을 추고, 키보드가 리듬처럼 두드려질 때마다, 손님들의 평범한 사진은 순식간에 화사한 잡지 화보처럼 바뀌었다.
처음 며칠은 내가 나를 따라잡지 못했다.
머리보다 손이 빨랐고, 단축키는 외운 것이 아니라 몸에 붙었다.
"자는 손이 와이리 빠르노?"
매장에서 근무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퍼포먼스'가 본사의 눈에 띄었다.
나는 손님을 응대하던 매장 직원에서 본사 사무실 소속의 편집 디자이너로 포지션이 옮겨졌다.
앨범 디자인부터 각종 판촉물 기획까지, 내가 다루는 작업의 범위는 넓어졌고 난이도는 높아졌다.
하지만 함께 일하던 연배 있는 형, 누나들의 시기 어린 시선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가 들어오면 대화가 한 박자 늦게 멈췄고, 내 이름이 나오는 듯한 웃음소리가 복도 끝에서 흩어졌다.
갓 스물을 넘긴 애송이가 들어오자마자 편안한 사무실에서 핵심 업무를 꿰차니, 내가 조직의 조화를 깨뜨리는 불편한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속도를 줄여볼까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멈추는 법을 몰랐다.
내가 만든 디자인이 실제로 인쇄되어 상품이 되고, 가맹점으로 뿌려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이 너무나도 좋았다.
나는 시키지도 않은 야근을 자처했다.
밤을 새워 작업을 해도 피곤한 줄 몰랐다.
당시 내가 받던 급여는 사실상 아르바이트 수준의 푼돈이었지만, 나에게 그 돈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생각하며 즐거워했다.
'돈까지 받으면서 이렇게나 귀한 실무 경험을 쌓을 수 있다니. 이건 남는 장사다.'
지하상가의 낮은 천장 아래에서, 나는 더 이상 갈 곳 없는 재수생이 아니었다.
프렌차이즈 사업은 대구를 넘어 호남까지 뻗어 나갔다.
광주의 가장 번화가에 우리 브랜드의 매장이 처음 문을 열던 날, 나는 본사 지원팀의 일원으로 차에 몸을 실었다.
세 시간 넘게 달리는 동안 창밖 풍경이 경상도의 산줄기에서 호남의 평야로 바뀌어 갔다.
처음 듣는 억양의 라디오가 버스 안을 채웠고, 나는 무릎 위 가방끈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내가 아는 건 동성로의 스타일뿐인데, 여기서도 통할까.'
오픈날 매장은 숨이 막혔다.
인화기가 뿜어내는 열기와 종이 냄새가 공기처럼 떠돌았고, 번호표를 쥔 손님들의 목소리가 천장에 부딪혀 되돌아왔다.
매장 밖으로 길게 늘어선 줄은 끝이 보이지 않았고, 파견된 본사 직원들은 쏟아지는 주문을 쳐내느라 숨 돌릴 틈조차 없었다.
문제는 '속도'였다.
기계처럼 사진을 보정하고 인화하다 보니, 작업물의 퀄리티가 어느 순간부터 눈에 띄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편집이라기보다 복사와 붙여 넣기에 가까운 작업들이 반복됐다.
동성로에서는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내 손이 처음으로 부끄러웠다.
빠르기만 한 손이, 여기서는 아무것도 지켜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커플이 내 앞에 섰다.
몇 시간을 기다렸는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표정이었다.
"이거 얼굴 좀 더 환하게요."
"문구는 더 크게. 그리고 색감은 좀 세련되게."
그들은 시계와 각종 굿즈를 주문하며 까다로운 요구사항을 쏟아냈다.
당시 매장의 편집 방식은 손님이 시키는 대로 소스를 배치하는 '수동 오더' 수준이었다.
하지만 요구를 그대로 따라갈수록 결과물은 더 조잡해졌고, 커플의 미간은 점점 더 깊게 찌푸려졌다.
긴장감이 감도는 정적 속에서, 나는 마우스를 다시 고쳐 잡았다.
"손님, 괜찮으시다면 저에게 한번 맡겨봐 주시겠어요? 제가 정말 예쁘게 만들어 드릴게요."
내 목소리에는 근거 있는 자신감이 실려 있었다.
커플은 반신반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머릿속에서, 그 시절 유행하던 영화 포스터의 레이아웃을 꺼냈다.
그리드를 맞추듯 요소들을 정렬하고, 톤 커브를 한 번 꺾어 사진의 공기를 바꿨다.
단축키를 치고, 글자를 이미지 위에 올렸다.
순식간에 완성된 결과물을 모니터로 돌려 보여주자, 조금 전까지 폭발 직전이었던 손님의 표정이 풀렸다.
"세상에, 진짜 영화 포스터 같아요!"
손님의 찌푸려진 미간이 그제야 펴졌다.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본사 부장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부장님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가맹점 사장님들에게 나를 특별하게 소개하기 시작하셨다.
"야가 우리 본사의 웹디자이너 출신인데, 이번 오픈을 위해 내가 고마 특별히 요청해서 데꼬온 핵심 인력입니데이. 실력이 쫌 다르죠?"
졸지에 나는 본사에서 파견된 '비밀 병기'가 되어 있었다.
과장된 소개가 부담스러웠고, 함께 파견된 다른 직원들의 시선이 등 뒤에 느껴졌다.
대구로 돌아온 뒤에도 부장님은 이 에피소드를 무용담처럼 자랑하셨고, 덕분에 내 봉투에는 작지만 묵직한 보너스가 담겼다.
대구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무의식 중에 허벅지 위를 두드리고 있었다.
E, S, R.
이레이저, 스탬프, 핑거.
지우고, 복제하고, 문지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