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부르는 거 좋아해?'
"잘은 못하는데, 듣는 거 좋아해."
'이따 노래방 가자!'
나는 노래를 좀 한다.
전형적인 한국 발라더.
발라드 락의 황태자.
로 친구들 사이에서 불렸다.
여기까지면 좋았을 텐데.
나의 자신감은 조금 넘쳤다.
인기~ 차트!
'혹시 듣고 싶은 노래 있어?'
"나 이거 좋아해!"
또-락!
(전주가 흘러나온다.)
...
(악을 쓴다.)
...
...
이상하게도 노래를 부를 땐
진심으로 몰입한다.
왜. 그 정도까지.
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
애써 호응해 주는 그 모습이 너무 좋았다.
너무도 좋은 만큼,
이불을 걷어찼다.
이 미칠듯한 소름 돋는 기분을
느껴본 적 있는가.
어.. 같이 심호흡을 해보자.
우선, 진정하자.
이불킥을 하는 창피함은
과도한 의욕과 미숙함의 합작이다.
미숙하면 힘을 좀 빼던가,
힘이 넘치면 완벽하던가.
물론, 둘 다 어렵다.
시간이 쌓이면서 미숙함이란
더 이상 창피함의 영역이 아니게 되었다.
미숙함은 곧 실력이자 전문성이 되고
이는 창피보다는 비난과 질책의 대상이 된다.
내가 창피함을 느낀 적이 언제였더라.
어느새 너무 딱딱하게 살고 있지 않나.
삶은 전쟁 같다 하던가.
나의 삶은 전장이 되었다.
미숙함은 곧 실수이고
실수는 곧 누군가의 기회가 된다.
목숨이 걸린 전장에서는
사소한 감정은 사치에 불과하다.
창피는 목숨을 건 피드백이 되었다.
창피함을 느끼는 건,
심각하지 않은 순간이다.
생명에 위협이 되지 않는 상황.
생계에 위협이 되지 않는 상황.
요즘 내가 창피함을 느끼지 못한 건,
나의 시간들이 살얼음판 위에 놓여있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연애 초기에 노래방 사태는
꽤 심각하긴 하다.
좀 더 솔직히는,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음에 만났을 때,
도저히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그' 순간이 내 머릿속에서
무한히 반복되고 있었으니.
애써 모르는 척해줘도,
괜찮다며 위로를 해줘도 나는 미칠 노릇이었다.
시간이 약이라 했던가. (아니던데..)
결국 스스로 인정하게 되었다.
여전히 이불을 발로 걷어차며,
'뭐 삑사리 날 수도 있지! 왜!'
냅다 외치며 선언을 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지금 돌아보면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아닌가 싶다.
창피함을, 미숙함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
그 자체로 인정하고
개선해 나가는 것.
안다.
스스로의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쉽지 않다.
하지만 끝없는 이불킥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인정하여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고 나서야 우리는 개선하는 길을
찾아보고,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스스로를 몰아치는데 특화되어 있다.
그래야만 한다고 배워왔으니까.
그렇기에 우리에게 다른 순간을 바란다.
일상의 작은 순간이라도,
조금은 말랑하게 만들어 창피함도 느낄 수 있기를.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을 벗어나
잠시 숨 돌릴 틈을 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