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시는 대신 머무르는

by 로그모리

마시기 위해 머물고

머물기 위해 마신다


비슷한 듯 다른 두 표현은

나에겐 어떻게 다가오는가


분명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도

두 표현 모두 사용할 수 있고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을까.



마시기 위해 머물다.


이분법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으나

마시기 위해 머무는 건, '마시는' 데 쏠려있다.


맥주도, 보리차도 마찬가지로

좋은 것을 눈앞에 두었을 땐 장사 없다.


와인, 위스키 등의 주류를 모여서 시음회를 하거나

다도 등을 배우며 좋은 향의 차를 마시는 자리 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 있다.

마시는 행위에 집중하는 자리도 있음을.


하지만 특별하지 않은 상황에서

마시는 데 초점이 쏠리는 경우도 있다.


술이 고파서, 다른 술자리를 찾거나

부족해서 혼자 집에서 더 마시는 등의.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제법 드물 것이라 생각한다.


때로는 객기로, 때로는 중독으로

그런 경험을 조금씩은 해보았으리라.


관계 이전에 마시는 행위에만 집중하던 시기는

다시 보면 스스로가 좀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머물기 위해 마시다.


앞서 설명과 동일하게,

'머물다' 에 보다 초점이 맞춰져 있다.


머무는 시간을 위해, 곁들임으로

마시는 것이 따라오는 시간이다.


종종 이 생각을, 상황을 이용하기도 한다.

사업을 하려면 술을 마셔봐야 한다는 관습처럼.


중요한 이야기를 할 건데, 버틸 수 있겠어?

일종의 테스트로, 활용 혹은 악용한다.


자리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때에

술로 인해 망가지는 경우도 있었다.


대개 어린 시절, 많이 마시고 취하면

그 과정에서 친해진다고 생각했으니.


다 같이 세월이 들어서일까,

힘들다는 것을 공유하게 된다.


술 대신 다른 음료여도 괜찮다는 합의가

자연스레 이루어지며 커피, 차 등으로 이동한다.


왜 그리 카페에 사람들이 모여있는지

이해할 수 없던 때도 있었다.


지금은 카페가 없으면

사람을 어디서 보나 싶다.


우리는 함께 머물 수 있는 시간이

더 중요하다 느끼며 합의점을 찾아간다.



한 사례씩을 예로 들었으나

사실 수많은 상황이 발생한다.


옳다, 그르다 를 재단할 수 없기에

각각의 상황에서의 기준이 중요하다.


개인적으로는 두 경우 모두

상대와 나, 우리의 관심사가 중심이다.


마시기 위한 시음회인지,

머물기 위한 대화의 장인지.


마시기 위한 해소의 장인지,

머물기 위한 테스트인지.


한 가지의 생각으로 전개할 수 없으나

더욱 분명하게 구분되는 순간들.


때때로 기준은 상황이 아닌

사람에 맞춰 정해지기도 한다.



맥주 대신 보리차를 마시면서

스스로의 머무는 시간이 달라졌다.


퇴근 후 맥주를 들이켜 마실 때는

은은히 올라오는 취기가 시간제한이었다.


얼추 4시간이 넘어가면

슬슬 취하는 게 잠이 솔솔 온다.


그 이후의 시간은 대개 집중보다는

억지로 앉아있는 시간이 많았다.


머무는 동안 마실 것이 보리차로 바뀌고

보다 명료한 시간이 길어지게 되었다.


분명 지칠 시간인데 라는 몸의 이야기를 듣고

그제야 나 오래 앉아있었구나 떠올리니.


스스로의 시간을 이토록 잘 사용하게 되며

외부 일정에서도 불필요한 자리는 피하게 되었다.


습관처럼 술을 들이붓는 만남은

다시 한번씩 고려하게 되었고


때로 내가 그런 역할로 존재하던 만남은

다시 그 자리를 돌아보며 재구성한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 라 했던가

스스로의 시간을 잘 쓰고 나니


주변을 살피고 대할 수 있게 되고

천하까지는 아직이지만, 나아가고 있다.



보리차에서 천하를 다스리는 이야기까지.

혼란스러운 과정을 따라와 줘 감사하다.


과격한 비약처럼 보이긴 하지만

결국 스스로를 대하는 태도의 이야기다.


마시기 위해 쌓아두던 맥주와 소주는

종종 다음날이 힘들 만큼 마시곤 했다.


퇴근 후 머물기 위해 마시던 맥주를

머물기 위해 마시는 보리차로 바꿨고


나의 하루는 더욱 알차게 시작되었다.


보리차를 마셔보자.

천하를 다스릴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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